귀촌의 추구미와 도달가능미의 사이에서
똠얌꿍을 해 먹었다. 감히 내가 똠얌꿍 같은 음식에 도전할 줄 몰랐는데… 똠얌꿍은 소울푸드 중 하나지만 완주에서는 절대 시켜 먹을 수 없어서 직접 해 먹기 시작했다. 내가 만든 똠얌꿍은 야매 버전이라 똠얌 페이스트와 피시소스, 코코넛 밀크, 새우만 물에 넣고 팔팔 끓인 것으로, 똠얌 ’국’에 가깝다. 된장국만큼 쉽다.
요리 에세이를 좋아한다. 요리 영화도 좋아한다. 요리에 대한 글을 읽고 영화를 볼 때면 요리가 자신과 세상을 돌보는 수련의 한 방법이자 자신을 지탱하는 부지런한 사랑 같았다. 나도 저렇게 살고 싶어! 제철 식재료를 유심히 고르고, 메뉴와 레시피를 고심하고, 조리법을 익히고 실험하며 나를 먹이는 데에 공들이는 생활은 귀촌하며 꿈꾸었던 모습이었다. 완주에 와서 매번 시도했다. 정성스러운 요리를. 그리고 늘 실패했다. 정성을 담는 것을.
정성스러운 요리에 실패하는 이유는 요리 못하는 사람의 특징을 다 갖추었으면서 그걸 고칠 마음이 좀처럼 들지 않다는 데에 있다. 레시피를 따라 하지 않고(재료만 갖춘다), 계량을 좋아하지 않고(이게 아닌데? 하면서 멋대로 추가함), 재료를 쉽게 대체해 버리기 때문이다. (‘코코넛 밀크’나 그냥 우유나 비슷한 우유 아냐?) 요리를 시도할 때면 의리 식사로 끝나는 경우가 다반사다. 애초에 그런 건방진 태도로 임해서 요리에 성공할 수 없겠지만. 그래서 요리 잘하는 사람에게 열렬한 동경을 보내고 밥해주겠다고 말하는 사람에겐 홀랑 마음을 뺏겨 버린다. 특히 완주엔 요리 잘하는 친구들이 많아서 야금야금 콩고물을 받아먹고 있다.
요리에 서툴지만 똠얌꿍을 해 먹을 때만큼은 후한 자부심이 든다. 내가 만든 똠얌꿍이 너무 맛있어서가 아니라, 똠얌꿍을 집에서 해 먹는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자부심이다. 그건 나만이 알아차릴 수 있는 작은 발전이다. 후루룩 야매 요리여도 때때로 운 좋게 흡족한 맛이 나오고, 그럴 때면 더더욱 의기양양 가슴이 부푼다. 요리를 못해서 이토록 쉽게 뿌듯해지는구나. 서툶의 쓸모를 발견해 낸 기분이었다.
“우리는 욕망을 마치 풀어야 하는 문제처럼 여긴다. 그래서 그 대상을 확보할 방법에 집중하지만, 사실 나와 욕망의 대상 사이에 놓인 공간을 갈망의 푸름으로 채우는 것은 다름 아닌 그 거리일 때가 많다. 어쩌면 우리는 시점을 살짝 조정하기만 해도 그런 욕망을 대상과는 별개로 존재하는 독자적인 감각으로 음미할 수 있지 않을까?” (길 잃기 안내서, P18)
리베카 솔닛의 이 문장을 읽으며 이상과 현실의 괴리 앞에서도 느슨한 태도를 단련한다. 추구미와 도달가능미처럼. (솔닛의 멋진 문장을 추구미와 도달가능미로 받아들이는 내가 좀 부끄럽지만.) 내 추구미가 리틀 포레스트여도 도달가능미는 똠얌’국’. 그러나 도달가능미가 조금씩 업그레이드되는 과정을 음미할 수 있지 않나. 처음 귀촌할 때는 생활에 온 정성을 들이고 싶다는 야심을 품었다. 얼렁뚱땅 끓인 뜨거운 똠얌꿍을 먹으며 ‘귀촌 생활,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에 멋쩍기도 하지만, 이상과 적당히 타협하며 차츰차츰 다가가는 과정 자체가 즐거울 수 있다는 걸 요리로 알게 되었다. 직접 캔 감자를 나눔 받아 제철 감자를 양껏 먹고, 친구가 “요즘 무화과가 제철이래.” 하면서 무화과 샌드위치를 해주면 이후로 무화과를 잔뜩 사다 먹는 날들이 나의 도달가능미. 품었던 이상을 당장 재현하고자 하는 건 그만두었다. 똠얌’국’ 다음은 어떤 요리가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