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7
오늘의 아침은 교토에서 맞았다. 도심지 번화가와 가까웠던 지난번 숙소와 다르게 여기는 호텔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동네다.
식당도 거의 없어서 갓-로손에서 간단히 아침을 떼우기로 한다. 전자렌지가 호텔 로비에 딱 하나 있는 탓에 방에서 왔다갔다 음식 들고 다니기가 상당히 귀찮다. 그래서 바로 먹으면 된다는 냉라면을 집어 왔는데 진짜 맛대가리 없었다. 라면은 역시 따뜻해야 한다.
오늘은 이번 여행의 주요 목표 둘 중 하나였던 금각사에 가는 날이다 (나머지 하나는 후지산).
금각사에 가고 싶었던 이유는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 금각사 때문이다. 금각사엔 '금각처럼 아름다운 것은 이 세상에 없다'라는 구절이 있다. 얼마나 예쁘길래 그런가 싶어 한 번쯤은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줄곧 해 왔다. 소설은 주인공이 금각사에 불을 지르는 걸로 끝나지만 그건 어찌 참아보기로 하고...
일본에 온 후 아침은 커피하우스에서 해결하는게 루틴이 되어 버렸다. 고급 경양식집이 연상되는 세련된 실내에서 정장을 차려입은 직원들이 서빙하는 교토역의 호시노 커피에서 오늘도 아침을 해결해볼 계획이다. 원래부터 유명한 곳인지 이른시간(10시)임에도 웨이팅이 있었다.
일어 메뉴 보면서 기쓰고 있었는데 바로 옆에 영어 메뉴가 있었다. 자꾸 중국인으로 착각하길래 수염을 한 번 길러봤는데 기분탓인지는 몰라도 보자마자 영어로 말하는 사례가 좀 줄어든 것 같긴 하다. 일본어를 이해하는 척 해야하는 부작용이 있긴한데 영어를 부르는 주문 '니혼고 데키마센'을 읊어주면 피차 편해진다.
모닝 세트는 730엔에 프렌치 토스트와 리코타 치즈가 올라간 샐러드가 나오고 추가로 핸드드립 커피를 한 잔 준다. 요즘 한국 물가를 생각하면 크게 비싼 편은 아니라고 느껴진다. 같은 구성으로 용산역에 카페를 차린다면 13,900원 정도는 족히 받을 것이다.
다른 세트에선 팬케이크를 고를 수 있는데 맨날 깡탄수만 때려박다보니 야채가 너무 먹고 싶어서 일부러 샐러드 포함된 걸로 주문했다. 추가금 없이 고를 수 있는 커피는 4종이 있으나 얼죽아 관성 때문에 생각없이 아이스 커피 블렌드를 시켰다. 핸드드립인거 미리 알았으면 핫으로 시켜볼 걸 그랬다.
적당히 배를 채우고 교토역에서 기타오지역으로 이동한다. 금각사를 가려면 여기서 버스로 갈아타야 한다. 버스 터미널이 바로 붙어있어서 표지만 따라가다 보면 정류장을 못 찾는게 더 어렵다. 잠실역 버스 환승센터 같은 느낌이다.
역사적인 첫 버스 탑승의 순간. 앞에 있는 한국사람들이 냅다 뒷문으로 타길래 고멘네 어글리 코리안 하고 있었는데 일본 버스는 원래 뒤로 타는 거였다. 또 한국 버스와 다른 점은 요금에 거리 추가가 안 붙는다. 표 가격은 230엔 균일가고 파스모도 잘 찍힌다.
금각사 정류장에 내려 길 건너에 보이는 표지판을 따라가면 어렵지 않게 금각사 정문을 찾아갈 수 있다. 이 날 진짜 미친듯이 더웠는데 참다참다 가방에 있는 접이식 3단 우산을 양산인 척 펼쳐서 쓰고 다녔다. 쪽팔리고 뭐고 일단 살아야겠다 싶은 날씨였다.
금각사 표가 되게 예쁘다. 얼핏 보면 부적같기도 하고 문에 쓰는 방 같기도 한데 기념품 삼아 걸어놓기 딱 좋은게 고객감동의 UX가 아닐 수 없다. 아 그리고 입장료는 카드결제가 안 되니 참고바람.
들어가자마자 사연있어 보이는 공터가 있어서 여행와서 처음으로 파파고 번역기를 돌려 보았다. 오인의 난이 뭔가 생각해보니 오닌의 난이 오인이라고 오인된 것 같음. (깔깔)
그리고 이제 코너를 돌면 드디어...
그 유명한 금각(사리전)이 바로 보인다.
아버지는 시골의 소박한 승려로, 어휘도 부족하기에, 단지 "금각처럼 아름다운 것은 이 세상에 없다."고만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나는 자신도 모르는 곳에 이미 미라는 것이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에, 불만과 초조를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미가 명백히 그곳에 존재하고 있다면, 나라는 존재는 미로부터 소외된 것이 된다.
<금각사>, 미시마 유키오
나는 또한 지붕 꼭대기에서 오랜 세월 비바람에 시달려온 금동 봉황을 생각했다.
...
다른 새들이 공간을 난다면, 이 금으로 만든 봉황은 번쩍이는 날개를 펴고 영원히 시간 속을 나는 것이다. 시간이 그 날개에 부딪힌다. 날개에 부딪혀서 뒤쪽으로 흘러간다. 날아 가기 위해 봉황은 단지 부동의 자세로 눈을 부라린 채 날개를 높이 들고 꽁지깃을 휘날리며 당당한 금빛의 양다리를 힘차게 버티면 됐다.
<금각사>, 미시마 유키오
그래서 나는 진정한 '미'를 느꼈는가? 흠... 사실은 그렇지 않다. 소설에서도 주인공이 금각을 처음 보고는 '아무런 감동도 일지 않았다. 그것은 낡고 거무튀튀하며 초라한 3층 건물에 지나지 않았다'고 하는 구절이 나온다. 다만 주인공은 시간이 지나며 금각의 아름다움을 점차 깨닫고 열등감마저 느끼게 되는데 내게는 단지 그럴만한 시간이 모자랐던 것일 수도 있다.
이제 돌아갈 시간. 토요일인데도 시간이 일러서 그런지 생각보단 사람이 많지 않아 행복했다. 내향인은 관광지에서마저 사람들이 붐비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다.
별개로 교토 시내에서 한국사람들을 거의 못 봤는데 어디 숨어있다 나타났는지 금각사에서 다 봤다. 나름 한국사람 찾는 팁이 하나 생겼는데 일회용 필카 들고 다니면 10000% 한국사람이다.
문전에 있는 2층카페에 들어가서 커피 한잔 시켜 먹으면서 몸과 마음을 쿨다운 시켰다. 오늘 일정은 금각사 외엔 생각해두질 않았으므로 다음에 갈 곳을 찾아야 했다. 교토 여행을 한다면 금각사 다음으로는 청수사, 은각사가 국룰인 것 같았으나 여기서 조금만 더 걸어버리면 마른 오징어 될 것 같아서 깔끔하게 포기했다. 찾아보니까 료안지, 닌나지, 호센인이 현실적으로 이동 가능한 범위 안짝이었다.
찾아보니까 호센인은 입장료 내면 녹차랑 과자 서비스로 준다고 한다. 지도 찍어보니까 금각사에 700m라 털레털레 걸어갔다.
생각보다 금방 도착해서 관람 시작... 했는데 입장료를 아무도 안 받는다. 입장료를 받아야 녹차를 먹을텐데 땀은 비오듯 흐르고 슬슬 애가 타기 시작했다.
성난 얼굴로 매표소를 찾아서 절을 쑤시고 다니는데 기도하러 온 동네 아주머니가 쟤는 왜 여길왔지?싶은 눈빛으로 나를 계속 쳐다보는 것이 아닌가. 쎄한 느낌에 지도를 다시 찾아봤더니 아뿔싸 이름만 같은 다른 절이었다. 절간 건물에 자동문 붙어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됐는데 스님들한테 맞기 전에 빠르게 가까운 문으로 탈출했다.
일단 2안이었던 료안지로 경로를 재설정하고 버스정류장을 찾았다. 59번 버스를 타면 바로 료안지로 갈 수 있다. 버스 기다리다 빈티지스러운 자동차 지나가길래 신기해서 찍어봤는데 뭔지 모르겠다. 앞에는 알파로메오같이 생겼다.
버스는 시내를 벗어나고 리츠메이칸 대학을 지나 약한 오르막길을 구불구불 올라간다. 버스 안 오길래 걍 걸어갈까 싶었는데 걸어갔으면 열사병 걸릴 뻔 했다.
금각사 표에 눈이 맞춰져 있어서 료안지 표는 평범하게 느껴졌다. 사실 표는 표일 뿐인데 괜히 금각사가 기준을 올려버려서 표를 받을 때마다 여긴 어떨까 하고 기대하게 된다.
료안지는 정원이 정말 아름다웠다. 금각사는 금각의 존재감이 커서 다른게 잘 보이지 않는데 이곳은 정원 하나하나가 과하지 않게 신경쓴 티가 나서 안정감이 느껴지기도 하고 디테일을 발견하는 재미도 있다.
이제 료안지에서 제일 유명한 석정(돌 정원)을 보러 갈 차례다. 어느 위치에서든 15개의 돌을 볼 수 없다는 걸로 유명하다고 한다. 말 안듣는 잼민이마냥 찾아다니면서 보이는데~ 보이는데~ 할 생각은 딱히 들지 않았고 그냥 앉아서 멍때릴 목적으로 방문함.
팻말을 따라 고각을 들어서면 곧 석정을 마주할 수 있다. 보는 사람에 따라 '이게 다임?'이라고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난 사실 굉장히 큰 감명을 받았다. 어쩌면 금각을 봤을 때보다 더 감탄스러웠다.
뭔가를 만들어 본 사람은 알겠지만 더하는 것보다는 빼는게 훨씬 어렵다. 음식을 만들거나 그림을 그릴 때도 아쉬운 것 같아서 뭐 하나 더 집어넣으면 전체가 맛이 가버린다. 이처럼 멈출 곳을 찾는건 아무래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갈, 돌, 이끼 단 3가지의 재료만을 배치해 이정도의 미감을 보여주었다는 것 자체가 내겐 너무 놀라운 사실이었다. 조용히 보고 싶어서 이어폰 끼고 한 20분동안 멍 때리면서 궁상떨다 옴. 정말루 좋았다.
건물을 끼고 오른쪽으로 돌면 숲을 바라볼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여기는 볕이 안 들어서 조금 더 시원한 편이다. 사진에 잘 담기지 않아서 아쉬운데 이곳 또한 말그대로 산수화를 눈앞에 재현한 느낌이었다. 여기서도 멍때리고 싶었는데 저녁시간이 가까워져서 발걸음을 재촉했다. 아쉽다ㅜ
숲길을 지나고 연못을 지나면 아쉽지만 끝이다. 중간에 문이 닫힌 음식점이 있었는데 시기 잘 맞춰서 오면 절 내에서 식사도 가능한 모양이다.
직전에 다녀온 금각사가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었다면 료안지는 절제와 여백의 미를 보여주는 공간으로서 완벽한 대비를 이룬다. 금각사가 불에 타버리고 복원 이후 '금박이 너무 두텁다', '고즈넉한 미를 상실했다'는 말을 듣는 반면 료안지는 여전히 일본식 정원의 정수로서 사람들에게 각인되어 있다.
삶에 있어서 비움이 얼마나 힘든지 아는 나로서는 아름다움이라는 건 이런 거라고 주장하는 듯한 금각보다는 오히려 눈에 띄는 부분을 만들지 않도록 절제한 료안지가 더 와닿았던 것 같다.
아 그리고 료안지는 패키지 투어로선 그닥 유명하지 않은지 단체 관광객이 많이 없고 그 말인 즉슨 비교적 조용하게 즐길 수 있다. 주변에 오는 사람이 있다면 꼭 한번은 들려보시길.
료안지에서 교토역까지 쏴주는 버스를 타고 복귀한다. 파스모 잔액이 없어서 처음으로 현금 결제를 해야 했다. 잔액부족 뜨고나서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는데 버스 아저씨가 도와주셔서 수월하게 해결했다... 현금도 없었으면 큰일 날 뻔 했다.
교토까지 왔는데 한 번쯤은 남들 가보는 데를 가봐야겠다 싶어 맛집을 검색해봤더니 하시다테라는 미들급 일식당에 대한 후기가 많았다. 도미요리가 유명하다길래 부시러 간다.
교토역 왤케 복잡하냐? 교토역에서 살아야 되나 고민하던 차에 다행히 나가는 길을 찾아내서 식당가에 입성했다. 한국으로 치면 더현대 꼭대기에 있는 전문식당가 느낌인데 웨이팅하는 사람 중엔 현지인들이 더 많았던 것 같았다 -> 는 잘 찾아왔다!
음식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정갈하다는 느낌. 일본 가정식이 원래 좀 슴슴한 맛에 먹는 건지 자극추구형 입맛인 내겐 먼가 부족했다. 매운 거 먹고싶다.. 불닭보다 매운거..
밥 먹고 나와서 마음의 고향 타리즈 커피에서 휴식을 취했다. 오늘은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테이블로 가져다주셨다. 타리즈 커피는 좌석에 있는 콘센트, 공부하는 학생들 같은 요소가 왠지 한국 카페를 떠올리게 만들어서 올 때마다 마음이 편해진다.
리프레시 끝내고 건물 2층에 돈키호테가 있길래 한 번 들려봤는데 한국인 국밥코스답게 입구부터 한국어 안내문이 반겨준다. 딱히 살 건 없었서 빈손으로 나왔다.
교토역에서 1키로 정도 걸어서 호텔로 복귀했다. 가는 길에 발견한 일본 패밀리 레스토랑 체인점 와쇼쿠 사토인데 숙소에서 멀지 않아 다음날 아침에 와볼까 싶어 찍어뒀다.
어제 사놨던 인스턴트 우동+산토리 하이볼로 마무리. 맨날 달다구리한 하이볼만 먹다 안 단 거 먹으니까 ?했는데 먹다보니까 점점 맛있어진다.
쨋든 이렇게 3일차 여행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