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6 | 공포영화에서 살아남기
후시미이나리의 붉은 도리이들은 독특한 홍색으로 칠해져 있으며 그 색채가 주위의 녹색과 조화를 이루는 한편 봄에는 주단의 벚꽃과 훌륭하게 어울린다고 한다. 이 벚꽃은 봄 방문과 함께 아름답게 꽃을 피우며 많은 관광객을 유치한다고 한다. 하지만 문제는 내가 봄도 낮도 아닌 여름 밤에 갔다는 것이다. 여름밤의 후시미이나리는 관광지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다.
신사의 명물 센본도리이(천개의 도리이)는 말그대로 입구부터 정상까지 수천개가 늘어서있다. 지금도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는데 좀 있으면 산을 덮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도리이가 죄다 똑같이 생겨먹어서 어디서 사진을 찍던 거기가 거기같아 보이는데 사실 다 다른 곳이다.
이 때가 9시 반 정도였는데 신사 초입엔 산책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어서 크게 무섭진 않았다. 다만 구라핑이 찍혀있는 이정표가 한두개씩 있는데 생각없이 따라가다 길을 잘못 들어 전율미궁 체험을 하게 되는 수가 있다.
이정표가 그림자에 가려서 잘 안보이는데 Mt. Inari는 오른쪽으로 가라고 되어있다. 바로 이때 나는 내가 산책이 아니라 등산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후시미이나리가 산 속에 지어졌다는 건 들어서 알고 있었는데 내가 그 산을 올라가고 있다는 건 꿈에도 몰랐다. 화살표를 따라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자 다시 한 번 도리이의 향연이 펼쳐진다.
참고 쭉 올라가다 보면 교토의 야경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체크포인트가 나타난다. 이게 야등의 매력이 아닐까. 피로가 싹 가시는 순간이다.
이 포인트에서 많은 사람들이 복귀를 택하는 듯 한데 어려서부터 산을 타기 시작했으면 정상을 봐야한다고 세뇌당한 탓에 꾸역꾸역 정상을 찍어보기로 한다. 이 때가 10시쯤이다.
길을 잘못 들어서 묘지를 마주친게 한 두번이 아니다. 어두운 밤과 묘지라는 환장의 콜라보 덕분에 털이 곤두서는 순간 때마침 외국인 몇명이 정상으로 향하길래 뒤에 바싹 붙어서 따라갔다.
는 야발 얼마 가지않아 다시 혼자가 되었다. 누가 표지판 같은 걸 보더니 룩앳 디스! 몽키 앤 와일드 보어 워닝! 하면서 멈춰섰기 떄문이다. 여러모로 도움 안되는 행동이었는데 덕분에 파티의 사기가 바닥을 치게 되었고 어쩔 수 없이 나만 떨어져 나오게 되었다. 앞서 가던 중국인 커플도 하나 있었는데 걔네는 위 사진 위치에서 겁을 먹고선 돌아갔다. 왜 그런가 하고 봤더니
존나 가기 싫게 생겼다. 마치 공포영화에서 주인공이 남의 말 무시하고 가다 객사하기 1분 전에 나오는 장면같다. 나도 그만 돌아갈까 싶었는데 호텔 돌아가도 할 것도 없고 해서 그냥 계속 갔다. 공포를 이겨내는 외로움이라... 참으로 슬플 따름이다.
다행히 잘? 가고 있다. 진짜 개무서웠지만 멧돼지 만나더라도 술안주거리 생긴 거라 럭키비키다 이러면서 멘탈을 잡았다. 다행히 멧돼지는 못 봤는데 쪼다같이 내 그림자 보고 계속 놀라서 좀 민망했다. 아무도 없었기에 다행이지.
또리이를 쭉 통과하면서 올라간다.
드디어 정상이 나온다. 몰랐는데 나중에 검색해보니 정상은 정말 아무것도 없다고 가지 말라더라. 거짓말이 아닌게 리얼루 저 참배소?하나 있고 아무것도 없다. 야경이라도 보일줄 알았는데 사방이 나무로 둘러싸여서 가시거리가 10m가 안 된다.
내려가는 길도 참 정감가게 생겼다. 그래도 가야지 어쩌겠나.
드디어 문명이다!!! 맨날 보던 편의점이 오늘따라 여섯배 더 반갑다.
후시미이나리에서 호텔까지는 2키로 남짓이라 걸어가려 했는데 긴장 풀리니까 걍 아무것도 하기가 싫었다. 덥기는 드럽게 덥고 그래서 이나리역에서 도호쿠지역까지 한 정거장을 전철타고 가는 사치를 부렸다.
tmi 하나 드랍하자면 이나리역에 야생 바퀴벌레가 엄청 많다. 진짜 엄지손가락만한데 걔네도 전철 같이 타는 줄 알았다. 사진은 도후쿠지역에서 호텔 가는 길에 찍은 야경.
들어오니 12시가 다 되어간다. 계획에 없던 야등을 하는 바람에 배가 몹시 고파져서 편의점에서 야끼소바를 하나 사 왔다. 유투바들이 맛있게 먹길래 따라서 사봤는데 내 입맛에는 좀... 미니어묵세트랑 기린맥주도 하나 사서 같이 먹었는데 얘네는 나쁘지 않았다.
이렇게 다사다난했던 2일차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