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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이 May 28. 2020

소녀의 사랑법

내 책상 위 이끼 인형


  내 책상 위에는 얼마 전에 만든 귀여운 토피어리 곰돌이와 거북이가 앉아 있다. 토피어리는 천연 이끼로 만든 인형을 토양 삼아 화초가 자라게 하는 장식소품이다. 몸통 안에 식물의 뿌리를 묻고, 철심으로 머리를 이어서 낚싯줄로 감아 모양을 고정시킨다. 이끼 얼굴에 눈과 코, 입모양 단추 부품을 끼워 넣으면 완성된다.

업무 다툼에 각박해진 마음을 달래고자,  동아리 활동 중인 아이들 틈에 살짝 껴서 만들었는데 제법 근사하다. 손 끝이 워낙 야물지 못해서 소심한 마음으로 시도한 것 치고, 강사님의 가르침대로 심고 감고 끼우니 신통하게도 인형꼴이 났다.


 마음의 여유가 필요할 때면 이끼 인형과 이따금 눈을 맞추고 감상하는 즐거움을 누렸다. 사무실에 들르는 방문객들도 귀엽다고 깔깔대며 사진까지 찍어가는 것이 내심 우쭐, 흐뭇하던 참이었다.

평소 내 업무공간에는 10대 아이들의 왕래로 바쁘다.  날도 소녀들이 이끼 인형 앞에 발길을 멈다. 그런데 기대했던 반응과는 영 다르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여학생이 “에구.. 가엾어라.” 한다. 내가 묻기도 전에 옆에 있던 친구가 물었다. “귀여운데 왜?”


넓은 꽃밭에서 자라야 할 저 식물이 인형 틈새에 낀 모양이 안쓰럽다며, 친구에게 덧붙다.
“네 목을 누가 꼭 누르고 있으면 너 같으면 좋겠어?”




마음 따스한 어린 소녀는 생명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 같다. '풀 한포기 쯤이야' 나는 그만 내가 바라보고 싶은대로 즐기며 바라봤다. 소녀는 가느다란 초록 가지 한 줌에서 생명의 깊은 호흡을 느끼고 공감했다.

우리 삶은 ‘자연의 삶’에서 한 참이나 멀리 와 있다. 문명의 발달 속 현재를 살아가는 세상은 '이끼 인형'이라는 부자연스러운 토양과도 같다.


세상에 갓 태어난 어린 생명은 곧 ‘교육’이라는 인간이 지어놓은 협소한 틀에 이식되어 건강한 자연으로의 성장 대신 인공적인 삶에 익숙해져 간다. 점점 더 치열해지는 경쟁에 내몰리는 어린 세대는 이끼인형 속 여린 가지처럼, 그 생명력을 억눌리고 있는게 현실이다.

매스컴에서는 마음의 병으로 극단을 선택하는 청소년들의 소식이 최근까지 비일비재했다. 학교를 거부하고 밖으로 떠도는 아이들은 점점 늘어간다. 물리적 폭력이 사라지고 인권을 말하는 다른 한편에서는 성적으로, 편협한 가치 기준으로 평가하고 예단한다.




생존의 위협에 직면해서,  생명의 고귀함에 대해 돌아보는 요즈음이다. 치닫던 경쟁을 잠시 멈추고 을 돌보며, 모두가 무사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 있다. 새삼 생존의 문제 앞에 더 중한 것은 없음을 깨닫는다.


콘크리트 안의 좁은 교실은 이제 넓은 공간과 낮은 담장으로 탈바꿈 해야만 생존이 가능하다고 한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지난 날의 일체교육 보다는 한사람 한사람 고유한 성향이 존중되는 자연스러운 성장을 추구하는 추세이기도 하다.


날로 비약을 거듭하는 문명, 바이러스의 출현과 같은 급변하는 세상의 혼돈 속에서 잃는 것도 있지만 얻어지는 것도 있다.


자연은 다양성과 혼돈의 모든 것을 포용한다고 하니, 이 모든 변화는 자연에 다름아닌 것이다. 우리 삶의 토양이 숨통을 조이는 '이끼인형'이 아닌 탁 트인 대지가 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길.



인간은 원래 타고난 지혜로움과 사랑의 소유자임을  어린 소녀에게서 배운다. 내일은 이끼 인형 속 내 화초를 위해 흙 한 줌 퍼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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