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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이 Aug 23. 2020

구름사다리 꼭대기에서

상아와 나, 그리고 엄마

상아(여중생. 가명)는 학교에서 자주 아프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건 일상이다. 명치도 갑갑하고 어지럼증도 수시로 찾아온다. 교실에서 친구들, 아니 또래 아이들 사이에서 어색하게 앉아있노라면, 온몸 구석구석 감각이 징징대며 상아의 마음을 잡아당긴다. 때로는 상아의 공허한 마음이 먼저 어디 아픈 데는 없는지 모든 감각을 두드려 깨울 때도 많다.    


상아는 학교에서 생활하는 것이 힘겹다. 재기 발랄한 친구들의 밝은 모습은 어눌한 상아를 더 주눅 들게 한다. 성적도 좋지 않아서 선행학습은커녕 교과서 내용도 버겁기만 하다. 가끔 학교에 가기가 죽도록 싫은 날이 있다. 


오늘이 그런 날이었을까?

견디다 못한 상아는 빼꼼히 학교 보건실 문을 열고 들어온다. 내 업무 공간이다. 상아의 낯빛은 까칠하다. 더운 여름날이지만 표정은 많이 춥다.     


“선생님, 아침부터 머리도 아프고 목도 아파요. 실은 어제저녁 때부터 그랬는데 아침에 더 심해졌어요.” 힘없는 말투다.

“코로나 의심 증상이 있으면 집에서 쉬어야 하는 거 알고 있지? 혹시 엄마도 상아가 아픈 거 알고 계시니?” 아픈 소녀의 심기가 불편하지 않길 바라며 물었다.

“네. 근데 엄마는 제가 결석하는 거 싫어하세요.”

아이의 눈빛은 불안하게 흔들린다. 나는 심호흡을 한다. 상아 엄마와 통화를 앞두고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서다.     


예상대로다. 엄마는 아이의 상태를 알리는 내 전화 연락에 긴 한숨을 내쉰다. 가뜩이나 코로나 때문에 오래도록 집에만 있었는데, 며칠 되지도 않는 모처럼의 학교 가는 날조차도 감당하지 않으려는 딸에 대해 하소연을 하신다. 반복되는 문제로 속상했던 날들을 떠올리며 엄마는 또 수심이 깊어진다.    


내 어린 시절 동네 공터는 하루 종일 노는 아이들로 가득했고 떠들썩한 놀이가 펼쳐졌다. 특별히 우리 동네 공터 한쪽에는 높다란 구름다리가 서 있었다. 키 작은 내가 아래에서 올려다본 그 꼭대기는 파란 하늘에 닿을 만큼 아득히 높았고, 햇빛 가루를 쏟아부은듯 눈이 부셨다. 아이들은 이 멋진 놀이기구를 날다람쥐처럼 날쌔게 기어올랐다. 

바로 그것이 내겐 공포였다.


애들은 구름다리 꼭대기까지 기어올라 의기양양했다. 그들과 달리 나는 그것이 너무 무서웠다. 오르기 시합으로 술래에게 쫓길 때 공포는 극에 달했다. 다른 애들처럼 태연하게 구름다리를 즐기는 척, 무섭지 않은 척하는 내 심장은 잔뜩 오그라들어 펄떡였다. 쇠 난간을 움켜잡은 손은 떨리고, 발은 허공에서 버둥거렸다.     


간신히 올라탄 구름다리 꼭대기에서 느끼는 아찔한 현기증은 지금도 생생하다. 금방이라도 발을 헛디디거나 부여잡은 난간을 놓치고 나락으로 떨어질 것 같은 오싹한 두려움. 동시에 ‘산다는 게 혹시 이런 걸까.’ 앞으로의 인생 전반이 벼랑 끝에 선 듯 날카로운 절망감이 어린 마음을 훅 스쳤다.    


살면서 때때로 찾아드는 불안감은 그때 처음 경험했던 불안과 공포의 기억 연장선에 있다. 여린 소녀의 수심 어린 표정에서 오래전 겪었던 첫 공포의 기억이 떠오른 건 왜일까.    


상아는 사교성 없고 수줍음이 많아 친구들의 주목을 받지 못한다. 지적 능력도 변변치 않아 성적도 좋지 않다. 이래저래 학교는 상아에게 곤혹스럽고 두려운 곳이다. 누군가에겐 만만한 일상이지만 상아가 맞는 바깥세상은 매일이 도전이고 정글이다.    


엄마는 남보다 뒤처지는 딸이 영 못마땅하다. 때를 기다리며 인내해 왔지만 딸의 성장하는 모습은 기대와 달랐다. 사랑하는 딸이지만 가끔은 감추고 싶은 부끄러움이기도 하다. 잘해도 불안한 세상인데 부진한 딸을 보면 막막함에 한숨이 절로 난다.    


상아의 세상은 학교와 가정이 전부다. 한쪽은 너무 버겁다. 다른 한쪽에선 수시로 보내는 근심 어린 시선이 따갑기만 하다. 상아는 아직 어리고 많이 미숙하다. 튼튼하고 성숙한 아이들보다 더 따뜻한 보살핌이 필요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 틈에서 발 딛는 세상은 벼랑 끝처럼 좁고 위태롭다.

    


경쟁 사회에서 부모로 살기란 참 어렵다. 더 이상 아이를 낳지 않는 풍토가 말해주듯 우리의 육아 환경은 살벌하다. 한가하게 아이의 재롱을 보며 행복한 건 잠깐이다. 이 땅의 엄마들은 전사와도 같다. 아이를 우월한 인간으로 성장시키기 위해 기민하게 육아 전쟁에 뛰어들어야 한다. 고질적인 교육경쟁, 학벌 경쟁, 직업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으려면 갈 길이 멀다.     


육아를 끝낸 지금, 성인이 되어 내 품을 떠나는 아이들을 보며 못내 후회스러운 것이 있다.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지 못해서, 좋은 교육을 못 해줘서가 아니다. 그들이 ‘내 사랑을 꼭 필요로 할 때’를 알아채지 못했다는 자책감은 두고두고 마음 아프다. 그때 말고는 그 사랑을 만회할 기회가 다시 오지 않음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손잡아 줄 걸 그랬어 (질책 대신)

꼭 안아줄 걸 그랬어 (잡아끄는 대신)

따스하게 눈 맞추고 얘기할 걸 그랬어  (바쁘다며 등 뒤에서 말고)

위로할 걸 그랬어 (훈계 말고)

함께 놀 걸 그랬어 (놀아주는 대신)

사랑한다 말할 걸 그랬어 (화내는 거 말고)   

 

사랑하지 않았던 후회만 가득하다.


문 밖의 아이 세상에는 즐거운 환상만 있지 않다. 가르치고 훈계하는 선생님, 평가자, 코치는  너무 많다. 열등감을 자극하는 라이벌이나 배타적 동료가 수두룩하다. 세상사와 관계에서 겪는 낭패감과 부끄러움, 슬픔, 외로움이 뒤범벅된 채 귀가하는 아이에게 필요한 건 오직 따뜻한 사랑이다.


엄마는 ‘엄마’의 모습으로 아이 곁에 있어야 한다. 열 번이고 백 번이고 자꾸만 힘껏 안아줘야 한다. 먼 훗날 후회하지 않으려면.


상아 엄마! 밖에서 다쳐온 상아를 따뜻하게 품어주세요.

주춤하는 상아를 등 뒤에서 꼭 안아주세요.

상아 마음에 공포가 뿌리내리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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