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아파트 맞은편에 얼마 전 또 다른 아파트가 우뚝 섰다. 창가의 아름다운 저녁노을, 길게 누운 산자락 풍경은 지워졌다. 높게 들어선 아파트 숲은 넉넉한 하늘 아래 나지막했던 동네를 온통 회색빛 시멘트 벽의 요새로 변모시켰다.
직장생활과 육아로 분주한 청년의 삶에서 편리와 효율을 좇기에 딱 좋은 아파트. 온 세상이 고만고만한 아파트로 가득하다. 그 안에서 복닥거렸던 내 삶도 성냥갑처럼 네모지게 단조롭다. 반듯한 네모상자에 욱여넣듯 정해진 삶을 살아가려 애썼다.
이런 생각에 눈앞에 불쑥 솟은 아파트가 더욱 못마땅해져서 창 너머로 실컷 눈을 흘겨줬다. 무심한 아파트가 내 시비에 대꾸할 리 없으니. 저 모양으로 똑같이 네모지게 나뉜 공간이 내 삶을 가두었다는 넋두리도 조금은 일리가 있다 느끼며.
지난 시절 아기자기했던 마을은 급격한 산업화와 인구증가에 발맞춰 서둘러 대도시로 탈바꿈했다. 그 결과 좁은 땅에 높다란 아파트가 빼곡하게 들어찼다. 반면, 나와 같은 중년 세대에게는 그 이전의 전혀 다른 삶이 추억 속에 살아 있다.
어린 딸들을 위해 젊은 아버지는 서울 변두리에 집을 지었다. 아버지가 정성껏 지은 우리 집 넓은 마당한가운데는 꽃밭이었다. 할머니는 크고 작은 꽃나무들을 정성껏 돌보셨다. 나는 땅에 낮게 돋아나는 채송화가 신기하고 귀여워서 쪼그리고 앉아 한참을 바라보곤 했다.
담장 아래 서 있던 물 긷는 수동펌프는 키 작은 내게 도전이자 자부심이었다. 펌프질은 압력에 저항하는 손잡이를 턱밑까지 높이 쳐들었다가 세게 아래로 눌러줘야 한다. 그때 발끝을 한껏 공중으로 띄워 손잡이에 온몸을 실어 누르면, 펌프 주둥이로 물이 쏟아졌다. 몸을 용솟음쳐 가며 누런 대야 가득 물을 길으면 어른들이 대견하다며 토닥여 줬다.
마당 귀퉁이에는 자그마한 강아지가 함께 살았다. 평소 어른이나 언니들에게는 순둥순둥한 녀석이 어린 나만 보면 멍멍대며 발뒤꿈치를 깨물 듯이 쫓아다니며 괴롭혔다. 마당을 지나 마루에 이르는 내 발에서는 그놈에게 쫓기느라 늘 신발이 나동그라졌다.
마루 아래로는 견고한 대리석 느낌의 ‘토방’이라는 공간이 넓게 이어졌다. 여기서는 동네 애들과 엎드려서 그림도 그리고, 글자랑 숫자 공부를 했다. 때로는 벌렁 드러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며 공상을 즐기다가 낮잠에 빠지기도 했다.
동네에 아담한 집들이 옹기종기 모이다 보면, 그 사이마다 골목이 생겨났다. 거기서 어른들은 두런두런 이야기꽃을 피웠다. 드문드문 만나는 여백의 널찍한 공터는 아이들의 왁자한 놀이터가 되었다. 우리는 해가 저무는 줄도 모른 채 밤이 이슥하도록 놀이에 빠졌다. 소꿉놀이, 망치기, 구슬치기, 고무줄놀이, 다방구, 술래잡기, 땅따먹기, 집짓기, 나물 캐기 등
내 아이가 속한 청년세대는 대부분 아파트 환경에서 나고 자랐다. 동네는 아파트 평수와 브랜드로, 단지별로 나뉜다. 네모반듯 똑같은 아파트촌에서의 삶은 먼 훗날 그들의 마음에 어떻게 추억될까. 오감을 만족시키는 디지털 세상 속 편리한 생활은 훗날 흑백사진 속 아름다운 삶의 풍경으로 간직될 수 있을까. 노인네 같은 내 괜한 걱정도 아랑곳없이 그들은 내가 모르는 빛나는 세계를 살아갈 것이다. 색다른 삶으로 그들만의 아름다운 추억을 쌓아가리라.
언젠가 아이들과 길을 걷다가 서로 다른 정서에 함께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넓은 하늘에 낮은 지붕들, 살짝 엉킨 전봇대가 서 있고, 남녀노소가 함께 북적이는 동네에서 정감을 느끼는 내게 아이들은 조금도 공감하지 않았다. 대신 높은 빌딩 숲과 곧고 넓은 도로, 아파트처럼 매끈하게 생긴 사람들이 드문드문 걷는 거리에서 아이의 표정이 아련해졌다.
조금은 한적하던 이곳 내가 사는 동네에도 여느 대도시처럼 크고 좋은 새 아파트 숲의 신도시가 속속 들어섰다. 편리하고 쾌적하지만 같은 시기에 지어진 신도시는 어디를 가도 다르지 않다. 비슷한 사람들이 비슷한 차림을 하고 살고, 아이들의 삶도 규격화된 듯 비슷한 모습으로 자란다. 높은 건물 위 하늘은 조각나 있고, 4차선 도로에서 갈 길 급한 사람들은 자동차 경적을 울려댄다.
새로운 도시가 탄생하면서 아름다운 구도시는 활기를 잃는다. 사람이 나고 자라 자연으로 돌아가듯 도시의 흥망성쇠도 순리인지 모른다. 그렇더라도 새로운 변화 속에서 지금껏 쌓아온 가치를 잃지 않기를 바란다. 다양한 아름다움이 공존할 수 있는 변화이기를.
지난날을 추억하다 보면, 획일적인 삶의 방식을 은근히 강요당한 듯한 아파트 생활에 염증이 느껴진다. 지금껏 함께한 애증의 아파트로부터 탈출을 꿈꾸며, 모종의 방도를 모색하기도 여러 번이다. 흙을 그리워할 줄 모른 채 성장한 내 아이들을 보며 갖는 자책감으로 더 조바심이 생긴다. 이제라도 나무와 풀이 숨 쉬는 마당의 정취를 함께 누리고픈 나만의 바람일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누군가는 멋진 아파트를 꿈꾸고 누군가는 마당 있는 집을 꿈꾼다.
그리고 또? ...
집에 대한 내 상상력은 고작 이 정도로 지극히 빈약하다.
미래에는 어떤 삶이 펼쳐질까? 세계는 지금 우주공간 속 화성에 집을 짓고 달나라를 여행하는 미래 문명사회가 시작되었다. 그런가 하면, 아마존 밀림 속 원주민처럼 문명과 동떨어진 삶도 존재한다. 그만큼 다양하고 새로운 미래를 닮은 기발하고 아름다운 삶터의 탄생을 기대하며 미래세대를 응원한다. 적어도 지금의 획일적인 아파트 삶은 넘어서야 하지 않을까.
인공지능의 최첨단 공간 또는 자연 속 오두막, 내 상상 밖 기발한 미래 공간으로 삶의 방식이 어떻게 변하든 본질은 같을 것이다. 사랑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행복한 삶. 내 노파심에도 불구하고 흑백사진 속 아름다운 추억은 미래에도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