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동굴 1화

by 으네제인장




“엄마, 다녀오겠습니다.”


문이 닫히자 마치 바닷물에 들어간 것처럼 윤서의 목소리가 멀어진다. 불과 조금 전만 해도 남편과 윤서가 만들어내는 소음으로 가득했던 집안은 문 밖으로 차가 출발 후 멀어지는 소리마저 잦아들자 다른 세상처럼 고요해진다. 햇볕이 들어오는 창가 안으로는 두 사람이 일으킨 먼지가 채 가라앉지 못하고 공중을 부유 중이다. 미선은 식탁 위 빈 접시를 치운 후 설거지를 마무리하고 곧바로 뜨거운 물을 올려 차를 준비한다. 차나 커피를 모아둔 서랍 안에는 선물 받은 고급 잎차도 여럿 있지만 그것을 굳이 못 본 척 지나쳐 마트에서 산 저렴한 티백에 손을 가져간다. 남편 정우는 이런 미선을 두고 좋은 것일수록 아끼지 말고 먼저 먹어야 한다고 말을 얹지만 형제가 없어 어릴 적부터 집안에서 경쟁할 일이 없던 미선은 언제나 맛있는 것은 아껴두었다가 마지막에 먹는 것에 익숙했다. 지금은 맛있는 게 있으면 딸 윤서에게 줄 몫을 제일 먼저 챙겨두지만 아직도 차나 커피처럼 혼자서 먹는 음식 앞에서는 여전히 귀한 걸 제일 뒤로 미루는 버릇을 고치지 못했다. 달리 값비싼 차를 마시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차 한 잔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을 미선은 늘 특별한 이벤트로 느꼈다. 어릴 적 엄마가 마시던 커피 하나, 설탕 하나, 프리마 하나를 넣어 만든 커피나 이후 줄기차게 마시던 믹스커피에 비해 홍차는 세련된 사람이 된 기분을 느끼게 했다.


소파에 앉아 멍하니 햇살을 내리쬐며 따뜻한 차를 홀짝인다. 미선은 이 적막함이 깨질까 차를 마실 때도 조심스럽다. 짧은 휴식을 취한 미선은 빈 컵을 싱크대에 올려놓은 후 앞치마를 벗지 않은 채 그대로 집정리를 이어간다. 간밤에 엉망이 된 안방 침대와 윤서 침대를 차례로 치운 후, 가족이 벗어두고 간 옷과 제멋대로 어질러 놓은 물건을 원래 자리에 돌려놓는다. 먼지를 털고 청소기까지 돌린 후에야 앞치마를 벗은 미선은 곧바로 옷을 갈아입고 문 밖을 나선다. 마당 한편에 자리한 텃밭에는 활짝 핀 꽃으로 가득하다.


미선은 가을꽃들이 뿜어내는 진한 꽃 향기에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그대로 텃밭을 지나 뒤쪽 문을 향한다. 나머지 가족은 쓰지 않는, 그러나 미선에게는 없으면 안 될 뒷문을 여닫은 후 곧바로 이어진 산을 향해 걸어 올라간다. 동네에서도 가장 꼭대기에 있는 집. 집과 마당이 있는 땅뿐만 아니라 집과 이어진 작은 산도 미선의 소유라 미선은 종종 아니 식구들이 없을 때면 거의 매일 산에 올랐다. 이 산이 아니라도 주변에는 산이 많았기 때문에 동네 사람들은 굳이 미선 소유인 이 산을 찾지 않았다. 이따금 미선이 산을 오르는 걸 본 사람도 있지만 마을에서는 어릴 적부터 말수가 적었던 미선의 성실한 산보를 두고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주변에 마땅한 시설이라고는 없는 동네에서 그저 취미 삼아 산을 오르겠거니 하고 말았다. 이전에는 미선의 엄마 역시 체력을 기를 거라며 걸핏하면 오르곤 했다.


윗 지방에는 온 산이 단풍으로 물들었다고 하지만 남쪽 지방에는 이미 많은 잎이 떨어져 숲 안은 우듬지보다 땅 위에서 잎을 찾기가 더 쉽다. 땅 위나 땅 속에 있는 동물들에게는 이보다 유리한 때가 없겠지만 그 위에서 활동하는 동물이라면 상황이 다르다. 아무리 몸짓이 작은 새라도 금세 사람 눈에 발각되고야 마는 계절이온 것이다. 아무리 인적이 없는 곳이라고 해도 이런 시기에는 행동이 더 조심스럽다. 누구 하나 지켜보는 이가 없지만 그래도 미선은 한 번 더 주변을 살핀다. 뿌리가 반쯤 드러난 나무 아래에는 미선의 집안 대대로 이어져오는 동굴이 있고, 매일 같이 들락날락 거려 풀이 자라지 않을 법도 한데 언제나 무성한 풀이 그 앞을 감추고 있다. 미선은 다시 한번 고개를 좌우로 살피며 확인한 후에야 허리를 굽히고 주저앉은 채 엉금엉금 기어 그 틈을 비집고 동굴 안으로 몸을 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