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을 굽히고 안쪽으로 기어 들어간 후 익숙한 듯 휴대폰 조명을 켜서 내부를 살핀다. 언제나 같은 곳에 놓인 캠핑용 조명을 찾기 위해서다. 불을 밝히면 윤서 방보다 좁은, 얼핏 다락방처럼 보이는 공간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림책 속에 나오는 작은 동물들의 그루터기 아래 땅굴 집처럼 아기자기한 멋은 없지만 자연이 만들어낸 공간치고 제법 깔끔하다. 가운데에는 방석처럼 사용하는 납작한 바위와 테이블 대용으로 쓰는 조금 더 큰 바위가 있고 구석에는 미선의 엄마가 썼던 남포등 두 개와 바위 옆으로 미선이 어제 두고 간 배낭이 있다.
익숙한 듯 바위 테이블 앞에 앉은 미선은 배낭을 무릎 위에 올려둔 후 책을 꺼낸다. 가방 안에는 책 말고도 노트와 필기구와 손수건이 있다. 자주 찾는 중고서점에서 산 책과 필사를 위한 노트와 필기구, 그리고 손에 묻은 흙을 닦거나 벌레를 조심스레 털어내기 위한 손수건이 이곳에서 필요한 전부다. 책은 집에서 읽는 것이 더 편하겠지만 되도록이면 책을 읽거나 간단한 글을 끄적거리는 모습을 가족에게 보이지 않으려 한다. 집에서 읽는 것은 오직 육아서나 요리책뿐, 식구들에게는 전업주부나 엄마로서의 삶에 완전히 만족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길 바랐다. 스스로의 욕망보다는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 미선이 오랫동안 추구해 온 삶이었다. 그렇지만 가끔은 그것 만으로는 조갈이 나서 독서나 글쓰기가 하고 싶을 때마다 동굴을 찾았다. 어쩌다 한 번씩 가던 것이 일주일에 한 번, 이틀에 한 번이 되었고 윤서가 커가며 집을 비우는 시간이 길어지자 한겨울이나 한여름을 제외하고는 매일 같이 반복하는 일과가 되었다.
최근에는 주로 식물에 관한 책을 읽는다. 신혼 때에도 꽃집이나 시장에서 절화를 사 와 집을 장식하는 일이 종종 있었기 때문에 정우는 아직도 기념일이면 미선을 위한 꽃다발을 선물로 사 왔다. 본가로 돌아오면서 텃밭을 작은 정원 삼아 꾸미는 즐거움을 배웠고 이제는 동굴을 오가느라 마주하는 바깥 식물들에 눈길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릴 때는 엄마가 있는 바다에 나가 노느라 산으로는 발길을 옮기지 않았지만 성인이 되어 돌아온 후로는 동굴에 가느라 산에 더 익숙해졌다. 감정을 감출 줄 모르는 사람처럼 다채로운 얼굴을 가진 바다에 비해 지루하거나 고루한 사람처럼 보였던 산은 실은 가까이 다가온 사람에게만 속내를 살짝 드러내는 장소였다. 무더위나 한파로 동굴에 가지 않는 날에도 매일 산에 올랐던 것은 숨은 그림 찾기를 하듯 산의 새로운 면을 찾는 즐거움이 있어서였다.
미선은 절화에서 정원, 그리고 산으로 관심이 옮겨가는 동안 새로이 알아가는 것들에 매우 들떠하는 동시에 자신이 세상을 향한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하는 것을 언제나 경계했다. 자기보다는 윤서나 남편을 위해 희생하기로 마음먹었고 그것이 진정으로 원하는 행복이라는 것을 잊지 않으려 애썼다. 동굴에서 두 시간을 보내고 나면 집안에서 하는 다른 일에도 더 충실할 수 있다. 두 시간을 허락한 것은 바로 그 이유에서였다. 미선은 동굴에 들어온 후로 내내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다 문득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고서 곧바로 책을 덮어 짐을 정리한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