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둣빛으로 물든 나날

4월 넷째 주

by 으네제인장

고속도로 양옆에서 연둣빛으로 물든 산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짙은 초록이 드문드문 묻어나는 갈색 산이었는데. 우리 동네 역시 연분홍에서 한때 짙은 분홍빛을 띠다가 주말 이후 연둣빛으로 탈바꿈했다. 이제는 모두가 나란히 새 잎을 내기 시작한 시기. 마지막까지 잎을 내지 않던 산딸나무도 뒤늦게 속력을 내기 시작하더니 어느덧 가지 끝에 꽃봉오리까지 생겼다.


온통 연둣빛인 동네에서 유일하게 다른 색을 내는 나무는 바로 단풍나무. 가을이 되면 서서히 다른 색으로 물들어가는 다른 나무와 달리 단풍나무는 봄부터 붉은 잎을 키워내고 있다. 초록 잎에서 광합성을 하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단풍나무는 늘 붉은색. 엽록소가 적은 걸까, 붉은 단풍나무 잎은 청단풍나무 잎에 비해 광합성에 불리하지 않을까? 궁금하다. 단풍나무는 늘 잎에만 주목했는데 봄에 보니 꽃과 열매가 눈길을 끈다. 특히 마른 부메랑로만 기억하던 씨앗이 지금은 노랑과 분홍이 섞인 열매가 되어 앙증맞게 매달려있다.


마지막까지 하얀 꽃을 달고 있던 꽃사과나무는 서서히 꽃잎을 떨구더니 어느덧 열매까지 맺기 시작. 열매가 커가는 속도가 벚나무보다 빠르고 열매 수도 더 많다. 벚나무는 주변에 워낙 많다 보니 경쟁력이 낮다면, 꽃사과나무는 그에 비해 수분 성공 확률이 높은 것 같다. 이렇게 맺힌 열매는 내년 봄까지 나무에 달려 있을 것이다. 지금도 가지에는 작년 열매가 말라버린 모습으로 몇 알 남아있다. 꽃사과나무에 생겼던 잎 구멍은 더 이상 크게 늘지 않지만 주변에 있는 벚나무 잎에는 하루가 다르게 구멍이 커지고 많아진다. 역시나 꽃사과나무 잎에서 봤던 하얀색 유충이 벚나무 잎 뒤에서 발견. 번식은 어렵고 벌레에는 약한 벚나무가 안타까울 지경이다.


이런 의미에서 가장 힘들어 보이는 건 소리쟁이. 소리쟁이는 성장 속도가 무척이나 빨라서 하루하루 따라잡기 어려울 정도인데 그 주변으로 검은색 진딧물과 이름 모를 유충이 함께 어울려 살고 있다. 진딧물과 함께 하는 개미까지 있다 보니 소리쟁이는 거리를 두고 봐도 부분적으로 검은색인 게 보일 정도다. 작년에는 여러 들풀들 사이에서 유난히 잎을 많이 뜯어 먹힌 채 잎맥만 남아있는 소리쟁이를 본 기억이 많다. 자신을 방어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건지, 아량이 넓은 성격인 건지 알 수 없다. 그에 비해 화살나무 잎은 어찌나 깨끗한지, 손상된 잎이 하나도 없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다.


하루는 소리쟁이가 수북하게 자라는 작은 땅 뒤로 나무에서 털을 뜯고 있는 직박구리를 발견했다. 앞에 있는 동백나무에서 꿀을 먹던 직박구리를 잠시 지켜보던 중 열심히 둥지 재료를 수집하는 직박구리 행동을 뒤늦게 알아차린 것이다. 작은 부리로 털을 수북이 물고 있는데 그걸로도 성이 차지 않는지 잠시 자리를 옮겼다가 다시 돌아가 털을 더 뜯은 뒤에야 두 마리의 직박구리가 한 번에 같은 방향으로 날아가버렸다.


직박구리에게 꿀은 무얼까. 겨울에는 빨간 열매들을 뜯어먹고 봄에는 매실나무, 벚나무, 동백나무 등 꽃꿀을 먹는다. 겨울 동안 떨어진 체력을 당을 통해 충전 중인 걸까. 일주일 사이에 알이 커져버린 자두나무 열매 주변으로는 개미가 열심히 기어 다니는데 열매 알보다 가지에서 나온 듯 보이는 뭉친 진액 주변을 한참 서성인다. 이런 개미는 직박구리의 먹이가 되기에 맛도 없고 크기도 작은 걸까? 얼마 전에 봤던 <자연다큐 죽음>에서 작은 딱새나 붉은머리오목눈이가 제법 큰 벌레를 잡아 새끼에게 나눠주는 걸 봤다. 그 장면을 떠올려 보면 역시나 개미는 직박구리에게 적당한 먹이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씨앗이 충분히 성숙할 쯤에는 과육도 부드러워지고 맛도 좋아질 테니 그때는 꽃 대신 열매를 먹는 새들을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 중이다. 아니어도 상관없지만.


이 주 전만 해도 자두나무를 보러 가는 길이 그리 험난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풀이 무성하여 용기가 조금 필요하다. 풀의 키가 자란 만큼 밟고 다닐 땅을 찾기도 어렵고 벌레도 늘어서 여러모로 조심스러운 것이다. 벌레가 옷에 붙는 것도 싫지만 무엇보다 이제는 나로 인해 목숨이 위태로워질 생명이 있다는 것이 신경 쓰인다. 얼마 전에는 참고 참다 겨우 한 번 들러서 몇 년째 정체를 궁금해했던 나무의 꽃을 확인하고 왔다. 매년 몸집을 키워나가는 나무는 봄마다 분홍꽃을 만개시켰는데 항상 멀리서 내려다보기만 하느라 이름을 알 수 없다가 이번에 알았다. 바로 병꽃나무라고 한다.


오랜 의문을 해결했으니 이제는 병꽃나무나 자두나무 근황이 궁금해도 되도록 찾지 않을 것이다. 나의 궁금증을 해결하는 것보다는 그들이 잘 자라는 것이 더 중요하니까. 인간의 방해에서 벗어나 자기네들끼리 잘 살아가는 모습을 멀리서 보는 걸로 만족해야지. 가끔 의자 위를 기어가는 유충이나 계단 옆 고둥, 인도 옆 달팽이처럼 뜬금없는 곳에서 예상치 못한 존재들을 만날 때가 있다. 그들은 우리를 놀라게 할 순 있어도 우리를 해칠 수는 없으니 이런 사사로운 방문은 기꺼이 받아들이되 나는 거대한 몸을 가진 만큼 자연 영역을 조심하면서 관찰을 이어 나기로 한다.




청단풍나무의 작은 열매와 단풍나무 열매
꽃사과나무 열매
성냥개비 같은 벚나무 열매와 제법 자란 열매
둥지를 꾸미는 중인지 나무에서 털을 골라 뜯어가는 직박구리
소리쟁이 위 진딧물과 유충, 나무 가지 위를 기어가는 개미
자두나무 열매와 오리나무 열매
경주 산딸나무 꽃과 우리 동네 산딸나무 꽃. 한눈에 봐도 다른 품종의 산딸나무.
한창 만개 중인 이팝나무, 둥근조팝나무, 다음 주면 만개할 병꽃나무.
벚나무 잎 뒤 유충, 벌레 먹은 흔적이 가득한 벚나무 잎
계단 옆 육지고둥, 버스 정류장 벤치 위 이름 모를 유충, 비 오는 날 달팽이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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