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월 13일
몇 년 전, 내가 통역번역대학원을 다니고 있을 때의 일이다. 나는 언어 습득에 유리한 유년기 시절을 해외에서 보낸 소위 ‘해외파’가 아니었기 때문에 대학원을 다니는 내내 나의 불안함과 콤플렉스는 ‘영어’였다. 내가 아무리 읽고 듣고 쓰고 말하기를 연습해도 어린 시절을 외국에서 보내 성장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영어를 습득한 해외파의 시간을 따라잡기에는 턱없이 부족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건 사실이기도 했다. 문법적인 오류를 고치고 의미 전달을 명확하게 하는 것까지는 노력으로 가능할지 몰라도 잠꼬대를 영어로 한다든지 비속어를 남발하는 외국인끼리의 대화를 자연스럽게 알아듣고 거기에 낄 수 있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수업시간에 교수님께 받는 크리틱도 비슷했다. 우리는 매 수업마다 원문을 읽어주면 그것을 반대 언어로 통역해보고 그것에 대한 크리틱을 받았는데 그 크리틱의 90% 정도는 모두 ‘영어가 아무래도 좀 부족하다’였다. 그 크리틱에 의심을 품을 여지는 없었다. 당연하지 않은가. 내가 한국어를 이렇게 기깔나게 잘하는데, 한국어는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눈치가 있는데 통역이 안된다 하면 그건 외국어의 능력이 부족한 탓임에 틀림이 없었다. 영어를 잘한다는 사람들이 걸러지고 걸러져서 온다는 곳이 통번역대학원이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거기를 다니는 동안 영어는 나의 가장 아픈 손가락이 되어갔다.
두 언어를 두고 씨름하는 매일이 흘러 어느덧 졸업학기가 다가왔다. 우리는 논문 대신 졸업시험을 치는 대학원이었는데 졸업시험의 모든 과목을 통과해야 석사학위 취득이 가능했다. 문제는 내가 이 시험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지 마지막 학기까지도 도무지 확신이 없었던 것이다. 어떤 하루는, 그날도 다름없이 혼자 앉아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문득 정말 지긋지긋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진짜 이렇게까지 안된다고??? 이렇게나 했는데 아직도 부족하다고? 그럼 도대체 앞으로 얼마를 더 이 짓을 해야 영어가 충분해지는 거야? 이 정도 해서 안되면 나는 그냥 이거 하면 안 되는 거 아니야?’ 드디어 울화통이 터진 것이다. 개도 서당에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나는 개만도 못한 머리인가, 이게 대체 정말 이렇게나 안될 일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고 대학원 재학 역사상 처음으로, 드디어, 그제야 이런 의문이 들었다. ‘혹시 영어가 문제가 아닌 게 아닐까?’
그도 그럴 것이 정말 영어가 문제라면 진짜 이 정도 했으면 이제 될 때가 되고도 남았을 텐데 아직 안 되는 걸 보니 그렇다면 영어가 진짜 문제인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뭐가 문제일까. 그래서 녹음해 둔 내 통역을 다시 듣기 시작했다. 대신 이번에는 영어 말고 다른 요소에 집중해서 들어보기로 한 것이다. 문장과 문장 사이의 연결은 매끄러운지, 거기서 의미를 제대로 파악한 게 맞는지, 그 논리가 맞는지, 내 한국어가 정말 괜찮은 게 맞는지, 단어 선택이 모호하지는 않았는지. 모든 것을 다시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관점을 바꾸어 들어봤더니 놀랍게도, 영어가 아닌 다른 문제들이 그제야 눈에 띄기 시작했다! (쓰고 보니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다. 영어 말고도 다른 문제가 많았다. 흐규.)
영어에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제와 내 영어를 더 나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어쩌면 그건 평생 안 되는 걸지도 몰랐다. 나는 영어 말고도 모든 분야에서 ‘난 이건 완벽해’라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없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따지면 사실 한국어도 완벽하지 않았다. 그런데 다른 부분은 내가 고쳐서 조금 더 나아질 수 있는 여지가 있어 보였다. 원문의 의미 파악을 좀 더 적극적으로 하고, 영어가 부족하다는 스스로의 콤플렉스를 버려서 좀 더 자신감 있는 통역을 할 수도 있었다. 영어에 대한 압박이 사라지니 더 쉬운 단어를 써서 훨씬 효율적으로 의미 전달을 할 수 있는 부분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스스로가 여유를 찾으니 내 통역을 듣는 사람도 조금 더 편하게 들을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그 해에 나는 졸업시험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아마 마지막 학기의 깨달음의 순간이 없었다면 나는 제대로 졸업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걸 의미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당연히 내 한국어가 문제가 없다고 믿었고 (사실은 그렇지 않았으니, 오만한 거였고), 통역에는 언어만이 중요하다고 믿었으며 (언어 외의 요소도 필요한 게 많기 때문에 통역이라는 것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내린 섣부른 판단이었다.) 영어만 완벽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 같았다. (나약하고 어리석은 자들은 가장 심플한 답을 믿으려고 한다. 그게 이해하기에 가장 쉽고 노력하기도 편하기 때문이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어쨌든 질문도 답도 옳지 않은 걸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졸업에 쫓기고 있어서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이 가장 큰 원인일지도 모르겠다. 꽤 오랜 시간 버티고 앉아 있었기 때문에 깨달음의 순간이 온 것일지도 모르고. 원래 그래서 도를 닦는 거니까.
그 이후, 인생이 안개가 끼인 것 마냥 어디를 가고 있는지 모르겠고 뭘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을 때 숨을 한 번 들이쉬고 내가 지금 올바른 질문을 하고 있는지 생각하려고 노력한다. 애초에 질문이 잘못되었다면 답을 찾아도 그게 정답이 아닐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질문만 제대로 할 수 있어도 훨씬 효율적인 답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눈 앞이 깜깜하고 막막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다. 그저 묵묵하게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몸과 마음을 건강히 하려고 노력하고, 나에게 올바른 질문을 던질 수 있도록 생각하는 것. 어쩌면 ‘네가 진짜로 하고 싶은 일이 뭐야? 네가 하고 싶은 것, 좋아하는 일을 해야지.’라는 질문이 백 프로 맞는 질문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한 번쯤 해보는 것, 그 외에 사회 통념상 옳다고만 여겨지는 질문, 당연히 옳은 줄 믿고 살았던 것들에 한 번쯤은 의구심을 가져보는 것. 여전히 쉽지 않고 수십 번 되새김질을 해야 한 번쯤 정신이 들까 말까 하는 일상이지만, 그럼에도 놓지 않고 질문하고자 한다. 나는 지금 인생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바탕으로 올바른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