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첫 책

2019년 1월4일

by 김은혜

엄밀히 말하면 정말 첫 책은 아니다.


내가 한참 자랄 무렵인 1990년대 우리 동네에는 책을 전집으로 사는 것이 아마 유행이었나보다. 내가 글을 막 읽을 수 있게 될 무렵 나의 엄마는 약간의 무리를 해서 책 3질을 들여다 놓으셨다. 과학 전집, 전래동화 전집 그리고 일반 동화 전집이었다. 보통 전집을 사두면 안 읽고 처 박아두기가 일쑤라고들 하지만 무슨 소리, 나는 책꽂이에 꽂혀있는 모든 책들을 몇 번이고 읽고 또 읽고 반복해서 읽었다. 내가 특히나 좋아했던 이야기들은 나중에 책 귀퉁이가 너덜너덜해 지기도 했다. 우리집에 내가 읽을 수 있는 책은 그 전집들이 유일했기 때문에 그것만 읽고 읽고 또 읽을 수 밖에 없기도 했다. 그래도 읽을 때마다 재미있었다.


엄마가 미리 사준 그 책들 덕분인지 나는 책 읽기를 제일 좋아하는 어린이로 자라났다. 학년이 올라가서 반이 바뀌면 그게 그렇게 가슴이 설레었다. 그 당시 우리 학교에는 각 반마다 다른 종류의 전집이 한 질씩 꽃혀 있었다. 1년에 걸쳐 내 교실에 있는 책을 다 읽어 버리고 나면 한 학년 진급을 해서 반이 바뀌어야지만 새 전집을 읽어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새 교실을 배정받아 가면 나는 제일 먼저 무슨 책이 꽂혀있는지부터 확인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였나? 내 옆의 짝이 뭔지 모를 분홍색 책 한권을 집에서 가져왔다. 처음보는 책이었다. 구경 좀 하자고 해서 한 번 슥 봤는데 그게 글쎄 너무너무 재밌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읽어왔던 동화책과는 조금 다른 책이었는데 뭔지는 모르겠지만 퍽 재미있었고 분홍색 표지가 예쁘기까지 했던 그 책을 나는 꼭 손에 넣고 싶었다.


그 날로 집에가서 엄마에게 졸랐다. 엄마, 짝이 무슨 책을 가져왔는데 그게 너무 재미있더라고 나도 제발 그거 한 권만 사주면 안 되겠냐고 아마 조금 울기도 하고 그랬던 것 같다. 그러자 엄마가 동네에 있던 근처 서점으로 나를 데려가 (나는 아직 그 서점이 어떻게 생겼었는지까지 어렴풋이 기억난다.) 그게 무슨 책이었는지 여기서 골라보라고 했다. 그 책은 바로 '어린이 낭송시집'이었다. 책을 낱권으로도 살 수 있다는 걸 그 날 처음 알았다. 그 전까지 내게 책은 모두 전집으로만 존재하는 거였는데, 큰 돈을 들이지 않고도 한 권씩 보고 싶은 책을 사 볼 수 있다니 새로운 세상이 열린 기분이었다. 내 인생에 처음 접한 책은 아니었지만 서점이라는 곳에 가서 내 손으로 처음 고른 책이기는 했다. 그 이후로 그 서점은 나 참새의 방앗간이 되었고 엄마에게 늘 사달라고 조르는 것은 책이었으며 돈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모았다가 책을 한 권씩 사보는 재미에 푹 빠졌다.


생각해보면 신기하다. 시 라는 것이 뭔지 개념도 몰랐을 그 나이에 그게 뭐가 그렇게 재미있었던 건지 모르겠다. 시가 재미로 읽는 글은 아니지 않나. 짐작으로는 그저 리듬감을 조금 느꼈을 테고 이야기와는 다른 방식으로 상상력을 자극하고 그 장면을 그려 보는게 좋지 않았나 싶다. 그 책을 보관하고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아쉽게도 이사를 하는 통에 잃어버린 건지 찾을 수가 없다. 혹시나 해서 인터넷에 한 번 검색을 해 봤더니, 당시 내가 무척이나 좋아했을 많은 시들 가운데 하나가 뜬다.


도토리

유성윤

때굴때굴 도토리

어디서 왔나?

단풍잎 곱게 물든

산골서 왔지.

때굴때굴 도토리

어디서 왔나?

깊은 산골 종소리

듣다가 왔지.

때굴때굴 도토리

어디서 왔나?

다람쥐 한눈 팔 때

굴러서 왔지.


정말이지 너무나도 맑고 귀여운 시다. 세상에 이런 걸 내가 그 어릴 때 좋아했다니, 새삼 내가 참 영특한 아이였구나 순수하고 맑은 아이였구나 하는 기특함마저 생기는 밤이다. 그리고 이 시와 함께 찾을 수 있었던 머리말에 또 한 번 마음이 찰랑한다.


머리말

시를 가슴에 품고 사는 어린이는

가슴에 별을 품고 사는 어린이.

꿈과 사랑을 품은 어린이.

별처럼 맑아라. 깨끗하여라.

시를 사랑하는 어린이의 마음은

가슴에 꽃을 가꾸는 마음.

향기롭고 아름다운 꽃의 마음.

꽃처럼 피어나라. 꽃처럼 생각하여라.

꽃처럼 살아라.


내 어린 시절이 애틋하게 그립다. 나는 가슴에 별을 품고 살던 어린이었고, 향기로운 꽃의 마음을 가지고 꽃처럼 피어난 어린이었다. 내가 그랬다. 가끔 스스로를 많이 미워하기도 하는 나인데, 이렇게 귀하고 예쁜 어린이었던 나에게 내가 감히 그래도 되나 싶다. 가슴에 별과 꽃을 품고 별처럼 맑게 꽃처럼 살거다 라고 다짐하는 충만한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