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보다 무거운 마음
새해가 밝고 첫 번째 수요일. 다행히 재정비 기간을 거쳐 도서관 카페의 닫혔던 창문을 다시 활짝 열었습니다.
3주 만에 맡는 원두 향기는 여전히 향긋했고 온수기 돌아가는 소리는 반가운 안부 인사처럼 들렸습니다. 기다렸다는 듯 찾아와 "왜 그동안 안 열었어요. 목 빠지는 줄 알았어요" 하며 너스레를 떠는 단골들의 타박조차 달콤하게 느껴지는 날이었습니다.
우리는 지난번과 같은 재정난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카운터 한쪽에 오늘의 후원자를 잘 보이는 곳에 세워두었습니다. 커피는 여전히 무료지만 여유가 있는 분들이 자발적으로 기부해 주신다면 더 오래 더 많은 분과 온기를 나눌 수 있다는 취지였지요. 후원해 주시는 분들의 이름을 A4용지에 멋있게 디자인 해 잘 보이게 두었어요.
점심시간의 전쟁 같은 러시가 한차례 지나가고 잠시 숨을 돌리려던 찰나였습니다. 주문대 앞으로 누군가 쭈뼛거리며 다가왔습니다.
낡아서 색이 바랜 점퍼, 헝클어진 머리카락, 그리고 거칠게 튼 손. 도서관 이용객이라기보다는 추위를 피해 잠시 들어온 듯한 다소 남루한 행색의 중년 남성분이었습니다. 그는 주문을 하려는 게 아닌 듯, 오늘의 후원자와 저를 번갈아 보며 한참을 망설였습니다.
"저기... 선생님." "네, 어서 오세요. 커피 한 잔 드릴까요?" "아니, 그게 아니고... 여기 후원은 얼마나 해야 하는 거요?"
그의 목소리는 아주 작고 조심스러웠습니다. 저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정해진 금액은 없어요. 백 원이든 천 원이든 마음 가시는 대로 해주시면 됩니다."
그는 그제야 안도한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하지만 발걸음을 돌리지 않고 다시 한번 머뭇거리며 물었습니다.
"그럼... 아주 적은 돈이라도, 오늘의 후원자로 이름을 올릴 수 있나요?"
적은 금액을 내는 것이 부끄러워 혹시나 이름조차 올릴 자격이 없는 건 아닌지 걱정하시는 눈치였습니다.
"그럼요! 금액이 무슨 상관인가요. 천 원만 내셔도 감사한 마음 담아서 후원자 이름을 올려 드려요."
제 씩씩한 대답을 듣자, 그 남자는 주머니 깊숙한 곳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냈습니다. 꼬깃꼬깃하게 접힌 천 원짜리 지폐 다섯 장.
그의 거친 손가락 사이에서 나온 5천 원. 누군가에게는 커피 한 잔 값도 안 되는 돈일지 모르지만 그의 주머니 사정을 짐작건대 그것은 결코 가벼운 돈이 아님을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오늘의 점심값이거나 며칠을 아껴 모은 비상금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큰 도움이 될 거예요."
저는 약속대로 종이와 펜을 집어 들었습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펜 끝을 종이에 대고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자신이 낸 돈으로 이름을 올릴 수 있는지 재차 확인했던 그였기에, 자랑스럽게 이름을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아니, 아니요. 됐습니다." "성함을 알려 주시면 올려 드릴게요." "아니요, 정말 괜찮아요. 그냥... 그게 되는지 궁금해서 물어본 거요. 됐습니다."
그는 손사래를 세차게 치더니 제가 다시 입을 떼기도 전에 홀연히 뒤돌아 사라졌습니다.
저는 멍하니 펜을 들고 서 있었습니다. 그는 왜 굳이 이름을 올릴 수 있냐고 물어봤을까요.
아마도 그는 확인받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자신의 5천 원도 이곳에서 환영받는 가치 인지를요. 금액이 적다고 해서 무시당하거나 이름 조차 올리지 못할 만큼 초라한 마음으로 취급받지는 않을지를 말입니다.
그것이 소중한 나눔으로 인정받는다는 대답을 듣는 순간 그는 이미 보상받았던 겁니다. 굳이 이름을 남겨 칭송받지 않아도 자신의 마음이 거절당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던 것이지요.
꼬깃한 천 원짜리 다섯 장이 유난히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어쩌면 지갑에서 쉽게 꺼낸 누군가의 5만 원보다 망설임 끝에 꺼낸 그의 5천 원이 우리 카페를 더 뜨겁게 데워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오늘의 후원자 "익명"이라 적어 잘 보이는 곳에 두었습니다.
"이름 없는 천사님, 귀한 커피값 잘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