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부 능선의 마음
문장으로 맺어진 인연은 가끔 예상치 못한 무게로 다가오곤 한다. 글쓰기 모임이 끝나고 물리적 거리는 멀어졌지만 마음의 거리는 예기치 못한 순간에 불쑥 좁혀진다. 얼마 전 함께 글을 쓰던 선생님께 걸려온 전화가 그랬다.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엔 채 녹지 않은 응어리가 가득했다. 주제는 '엄마에게 끝내 인정받지 못한 서운함'. 누구에게나 생의 한 대목쯤 품고 있을 아픔이지만 그날 그녀의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같은 궤도를 맴도는 하소연이 30분을 넘어가자 정성껏 들어주려던 내 마음에도 과부하가 걸렸다. 어떤 문장으로 위로를 건네야 할지 몰라 당황하던 찰나 적막을 깨고 현관문이 열렸다.
"남편이 왔네요."
그 한마디를 끝으로 서둘러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하지만 매끄럽지 못했던 마무리는 마음 한구석에 가시처럼 남았다. 며칠 뒤 조심스레 안부 문자를 보냈지만 돌아오는 답장은 없었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내가 그녀에게 상처를 준 건 아닐까' 하는 부채감이 차올라 마음이 무거웠다.
문득 도서관 카페에서 바리스타로 봉사하며 배운 이치가 떠올랐다. 아무리 귀하고 예쁜 잔이라도 담을 수 있는 용량은 정해져 있다는 것. 넘치도록 담으려 애쓰다 보면 결국 잔을 타고 흐르기 마련이고 그 얼룩은 지우기 힘든 자국을 남긴다. 내 마음의 잔도 마찬가지였다. 그날의 나는 그녀의 서사를 다 품어내기에 이미 가득 찬 상태였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그 무거운 미안함을 조금 덜어내 보려 한다. 내가 보낸 문자는 내가 건넬 수 있었던 최선의 다정함이었음을 인정하기로 했다. 답장 없는 그녀의 침묵 또한 '상처'가 아닌 스스로를 다독이는 '정돈의 시간'이라 믿어본다. 그녀 역시 쏟아낸 말들을 천천히 복기하며, 마음의 먼지를 털어내고 있을 것이라고.
누군가의 아픔을 묵묵히 들어주었던 그 시간만큼은 나의 진심이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오늘은 오로지 나를 위해 정성껏 커피 한 잔을 내린다. 컵의 8부 능선까지만 찰랑이는 따뜻한 액체를 가만히 바라본다. 가득 채우지 않아도 커피는 충분히 향기롭고 따스하다. 나의 다정함에도 때로는 숨을 고를 수 있는 적당함이 그리고 쉼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제야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