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아시아 총괄사장 스벤(Sven)과의 만남
상훈의 얼굴이 사라진 검은 화면을 보며 나는 직감했다. 지금 상훈에게 필요한 것은 투자자의 날 선 지적이나 변호사의 법리적 조언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회의가 끝난 뒤 얼마 안되어 상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 대표님, 괜찮아요?”
“전혀 괜찮지 않습니다, 변호사님.”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려주었다. 잠시 후, 차 시동을 거는 소리와 함께 결심이 선 듯한 상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바로 박희수 차장과 함께 DH테크 공장으로 내려가고 있습니다. 일단 제 눈으로 직접 봐야겠습니다.”
다음 날 아침, MGK 사무실에서 만난 상훈의 얼굴은 밤새 한숨도 못 잔 사람의 것이었다. 사장 책상 바로 앞에 놓여진 회의 테이블 위에는 장갑 일곱 켤레가 놓여 있었다. 장갑의 손바닥 부분, 매직 글러브 본사가 자랑하는 특수 코팅이 되어 있었던 부분이 마치 뱀 허물처럼 흉하게 벗겨져 있었다. 상훈의 옆에는 DH테크 영업담당자였던 박 차장이 금방이라도 울듯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사용한지 2주도 안된 것들입니다. 기능성, 내구성이 저가 제품과는 차원이 다른 '명품 장갑'이라고 해서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구매했는데,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김대표님?'
DH테크 공장장의 날카로운 질책이 귀에 다시 들리는 듯, 상훈은 괴로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자금 고갈, 영업 부진만으로도 충분히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이제는 제품의 신뢰도까지... 사방이 벽으로 막힌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어제 밤 스웨덴 본사에 메일을 보냈습니다. 본사에서 받은 회신을 변호사님께 아침 일찍 보내드렸는데... 읽어 보셨죠 변호사님?”
본사에서 온 메일은 이랬다.
'유감스러운 일이군요. 아직 저희는 이런 하자를 경험해본 일이 없습니다. 아마도 고객의 특수한 작업환경이 원인이 아닐까 추측은 됩니다만, 해당 제품들을 스웨덴 연구소로 보내주시면, 원인을 분석한 후 결과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저희 제품 자체의 하자라고 밝혀지면 당연히 지난 번 DH테크로 납품되었던 제품 전량을 회수하고 정상 제품으로 교환해 드리겠습니다. 통상적으로 6주에서 8주 정도 소요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6주에서 8주면 그건 MGK에게 사형선고나 다름없습니다. 그사이 고객의 신뢰는 바닥으로 떨어질 것이고, 업계에 소문이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갈 게 분명합니다."
상훈의 목소리는 점점 더 격앙되어 갔다. 당장이라도 스웨덴으로 날아가 본사 사장의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였다. 그때, 나는 그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
“김 대표님, 흥분하면 집니다. 이럴 때일수록 더 차갑고 논리적으로 접근해야 해요. 이건 단순한 품질 클레임이 아닙니다. 이건 MGK의 생존과 매직 글러브 브랜드의 한국 시장 안착이 걸린 ‘협상’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상훈과 함께 회의실에 앉아 전략을 짜기 시작했다.
“첫째, 우리는 ‘피해자’가 아니라 본사의 ‘파트너’라는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우리가 '피해자'면 상대방은 '가해자'가 될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협조적으로 나오기보다는 방어적인 스탠스를 취할 것이 확실합니다. 아마도 내부 법무팀이 바로 관여를 시작할 거구요. 그렇게 되면 이번 사태의 조속한 해결은 불가능합니다. Legal issue가 아니라 Business issue로 접근해야 합니다. 우리가 무너지면 한국 시장을 잃는 건 그들이라는 점을 인식시켜야 해요. 둘째, 막연한 호소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논리적인 요구사항을 제시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번 사안과 관련하여 최종적인 결정권을 갖고 있는 사람과 직접 대화해야 합니다.”
나는 상훈과 함께 그 자리에서 바로 매직 글러브 아시아 본부가 있는 싱가폴로 보낼 메일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메일의 수신인에 아시아 지역 총괄사장의 이름을 넣었다. 우리는 이번 사태에 어떻게 대처하는지가 앞으로 한국 시장에서 매직 글러브 브랜드의 성공적 안착 여부를 좌우할 것이라는 점을 '파트너'로서 강조했고, 문제 해결의 골든 타임을 놓치면 매직 글러브는 한국 시장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는 점을 정중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적시했다. 메일을 보낸 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아시아 지역 총괄사장 비서실로부터 화상 회의를 하자는 연락이 왔다.
화면 너머로 나타난 아시아 지역 총괄사장 스벤(Sven)은 짙은 갈색 뿔테 안경 너머 보이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우리를 훑었다. 금발에 파란 눈, 단정하게 손질한 수염... 전형적인 북유럽 중년 신사였다. 상훈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감정적인 호소 대신 준비한 자료를 바탕으로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사장님, 저는 지금 불량품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한국 시장의 파트너로서, ‘우리’의 브랜드가 위기에 처했음을 알리고 함께 해결책을 찾기 위해 오늘 회의를 요청했습니다.”
상훈은 하자 제품들의 사진과 함께, 이번에 클레임을 제기한 고객사가 관련 업계에서 갖는 위상, 그리고 이번 사태가 이제 막 싹을 틔우기 시작한 ‘매직 글러브’라는 브랜드의 한국 시장 진입에 미칠 치명적인 영향에 대해 그리 유창하지는 않지만 정확한 영어로 차근차근 설명했다.
“저희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네 가지 사항을 요청합니다. 첫째, 하자 제품 전량의 즉각적인 회수 및 항공편을 통한 정상 제품 발송. 둘째, 고객사에 전달할 본사 명의의 공식 사과 서한 발송. 셋째, 제품의 반품이나 교환 요구에 대비하기 위해 무상으로 제공받는 버퍼재고(buffer stock)를 당분간 구매물량의 2%에서 5%로 상향 조정. 넷째, 이번 사태로 실추된 브랜드 신뢰 회복을 위한 초기 마케팅 비용 지원입니다. 물론, 세번째 요청사항인 버퍼재고의 상향 조정은 제품의 하자 발생율이 정상 수준으로 감소되는 것이 확인된 후에는 당초 계약한 수준인 2%로 환원해도 무방합니다.”
상훈의 차분하고 당당한 태도에 스벤은 조금 놀란 듯했다. 스벤이 보고 있는 상훈의 모습은 일방적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을’도 아니었고, 하자로 인한 손해의 배상을 요구하며 본사를 공격해오는 '피해자'도 아니었다. 스벤이 보고 있는 상훈은 중요한 시장인 한국 시장의 개척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를 함께 해결할 방안을 제시하고 있는 ‘파트너’였다.
긴 침묵 끝에 스벤이 입을 열었다.
“김 대표님의 제안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파트너의 위기는 곧 본사의 위기라는 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DH테크에 납품된 제품 전량을 교체하기 위한 정상 제품은 2일 이내에 본사의 승인을 얻어 항공편으로 발송하겠습니다. 그리고, 괜찮으시다면, 공식 사과 서한은 아시아 총괄사장인 제 명의로 작성해서 내일까지 이메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나머지 제안 내용들도 모두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스웨덴 본사와 협의한 후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조치하겠습니다.”
회의가 끝나자, 상훈은 의자에 주저앉듯이 몸을 기대며 말했다. 그의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정말 불행 중 다행입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변호사님의 조언이 큰 힘이 되었네요. 그런데... 앞으로도 이런 일이 많겠죠? 어려움이 있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와... 힘드네요. 하하"
상훈은 그에게 닥쳐온 첫 파도를 무사히 넘었다. 이번 위기의 해결 과정을 통해 그는 자신이 단순히 물건을 파는 세일즈맨이 아니라, 회사의 운명을 걸고 협상 테이블에서 노련하게 협상할 줄 아는 CEO의 모습에 가까이 가고 있음을 느꼈을 것이다.
사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그날 회의는 MGK와 상훈에게 제품 하자 사태 해결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우리는 그날 컴퓨터 화면에서 처음 보았던 아시아 총괄사장 스벤이 나중에 상훈에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될지를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