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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은희 Jun 10. 2021

구천면로에 살다

유년의 언덕에 오르다

제목: 구천면로에 살다

“저, 결혼 전에 살았던 주소를 알고 싶은데... 그러려면 어떤 서류를 떼어야 할까요?”

주민센터 직원에게 물어보고 나서야 좀 후련해졌다. 쉽게 생각날 줄 알았던 주소가 생각나질 않았다. 태어나서 백일쯤에 이사 와서 중학교 때까지 살았던 그 주소를 아무리 떠올리려고 해도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았다. 15년을 넘게 살았던 그 동네는 아주 좁은 골목이었고, 그 골목을 가운데에 두고 열 집이 넘는 집들이 쭈욱 이어져 있었다. 대문만 열고 나가기만 하면, 다닥다닥 붙어있던 집들이 바로 눈에 들어오는 그런 곳이었다. 오랜 세월 속에 주소는 잊었지만, 그래도 그 골목을 그리라고 하면, 어느 정도 비슷하게 그릴 수는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구천면로에서 30년 가까이 살다가 결혼으로 그곳을 떠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곳이 얼마나 익숙하고 정겨웠는지... 나는 내게 특별했던 그곳의 주소가 몹시도 알고 싶어 졌다. 그저 단서(?)가 될 거라고는 천호동이라는 것밖에 없기에, 나보다는 그곳에 더 오래 살았던 친언니에게 물어보았지만, 굳이 몇십 년 전 주소를 왜 알려고 그러느냐는 심드렁한 대답뿐이었다. 결국 주민센터에 가서 물어보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고 생각했다. 초본을 받고 내가 살았던 주소들을 보자 그제야 낯익은 숫자가 눈에 들어왔다.

‘서울특별시 성동구 천호동 281-11’이었던 주소는 1975년 강남구로 행정구역이 변경되었고, 1979년에는 강동구로 바뀌었다. 같은 집에 살고 있었던 그 기간에 행정구역이 3번이나 변경되었다니... 그리고 지금은 구천면로를 불리는 도로를 중심으로, 내가 살았던 골목이 아직도 유지되고 있다고 하니 더더욱 신기하고 그리울 따름이다. 집으로 돌아가서 봐야지 했던 것과 달리 가던 걸음을 멈춰서 가방에 넣었던 초본을 꺼냈다. 긴 장마 끝에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면서 서류를 넘기다가 불현듯 제일 앞장으로 가서는 ‘천호동 281-11’을 보고 있노라니 그 종이를 뚫고 시간을 뚫고, 겹겹이 가려져 있었던 어릴 적 내가 걸어 나오는 듯했다. 그렇게 나는 길가에 서 있다가 뜻하지 않게 내 유년시절과 마주했다...

천호초등학교를 다녔던 나는 지금의 ‘구천면길’로 다니지 않고 잡초로 무성했던 풀밭을 헤치고 벽돌공장이 있던 길을 지나서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 습관은 우연히 기르게 된 토끼에게 줄 풀을 뜯어 와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이어져서 내 하굣길은 다른 아이들에 비해서 꽤 길어지곤 했다. 하얀색 토끼는 내 생애 처음으로 완벽한 ‘내 것’이었다. 4남매의 막내로 살았던 내가 가질 수 있었던 건 언니들이 물려준 옷들, 오빠가 준 학용품, 그리고 좁은 방에서 아무 이불에서 자다가 눈 뜨는 아침뿐이었다. 그런 내게 생긴 토끼는 그 어떠한 것보다도 강력한 애정으로 이어져서 신선한 풀을 먹이로 갖다 주기 위해서 비가 오는 날도 마다하지 않았고, 쉽게 냄새나는 토끼집을 깨끗이 청소해주었으며, 한밤중에 자다가도 나와서 토끼를 어루만져주다가 어머니께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하지만 토끼와의 시간은 길지 못했다. 그날도 어김없이 다리에 생채기가 나는 줄도 모를 정도로 좋은 풀을 찾아서 이리저리 풀숲을 헤치고 돌아다니다가 돌아왔는데, 토끼가 보이지 않는 거였다. 어설프게 만들어준 토끼집을 뛰쳐나왔나 싶어서 아무리 찾아봐도 토끼는 보이지 않았다. 작은 마당을 수십 번도 다 뒤져보고 방까지 들썩여 보았지만 끝내 하얀 토끼, 내 토끼는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울고불고 토끼를 찾다가 잠이 들었던 나는 달짝지근하면서도 매콤한 향기에 이끌려 눈을 떴다. 그 냄새를 맡자, 토끼를 찾다가 점심 먹는 것도 잊어버렸던 내 뱃속은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일어나서 부엌으로 가자, 어느새 저녁이 되어 밥상을 차리고 있던 엄마는 나를 안쓰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셨다. 아무래도 토끼는 집 밖으로 나간 것 같다며 어쩌겠느냐는 말도 하셨다. 그리고는 오랜만에 삼촌도 오셨다면서 저녁상을 다시 분주하게 차리셨다. 간만에 온 삼촌은 유독 나에게 생글거리며 다음에 더 예쁜 토끼를 사주겠다면서 그놈의 없어진 토깽이는 그만 잊어버리라고 했다. 삼촌이 들고 들어온 저녁상에는 아까 내 잠을 깨웠던 걸로 여겨지는 고기반찬이 뜨거운 김을 내뿜으면서 맛깔지게 놓여 있었다. 여전히 내 후각을 자극하는 그 맛난 냄새에 이끌려 상 앞에 바짝 다가선 내게 엄마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 고기를 밥 위에 얹어주셨다. 나는 잠이 덜 깼음에도 불구하고 폭발적인 식욕을 느끼면서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이미 내 코는 밥그릇 속에 처박혀 있었고 꿈틀대는 식욕으로 토끼의 실종 사건은 잊은 것처럼 보였다. 오랜만에 먹은 고기반찬에 빠져버린 나는 토끼를 찾아야겠다는 다짐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얕은 희망도 같이 먹어버린 것 같았다. 그토록 소중한 나만의 토끼는 원래 삼촌이 가져온 것이었고, 하필 그 토끼가 사라진 날 삼촌도 왔다는 것도 희한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울다 잠들어서 하필 토끼 눈처럼 빨개진 눈을 해가지고 매운 고춧가루 양념 속에 감춰진 고기를 한 점이라도 더 먹겠다는 생각만 앞서는 것이었다...그 이후에 시간이 지나면서 문득문득 들었던 의구심과 추측, 그리고 여러 결말과 부정 등은 생략하고 싶다. 그러고 보면 난 너무 많은 것을 잊고 살았다. 구천면로의 좁은 골목길도 동네 친구도 쌀가게 아주머니도 구멍가게 할아버지도 잊고 살아왔다.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토끼의 시계처럼 꺼내보고 싶을 때만, 기억하고 싶은 것들만 들여다보다가, 그나마 “이런! 이런! 너무 늦겠는 걸” 하면서 내 유년시절은 새까맣게 잊은 채 앞만 보고 달려갔던 것은 아니었을까?

어쭙잖게 1976년 아홉 살이었던 나와 마주한 나, 내가 살았던 동네와 사람들 이야기만으로도 좋은 추억이 많은데, 그냥 묻어도 될 만한 ‘비열했던 유년 시절’의 에피소드를 하필 ‘구천면로를 기억하다가 끄집어내다니... 예쁘고 순수했던 동화의 한 장면 같은 얘기로 바꾸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잠시, 난 아홉 살 여자아이가 몹시도 그리워졌다. 이 이야기 속에 나오는 여자아이의 식탐과 미련함에 헛웃음이 나오다가도 구천면로의 내 유년을 마주하자, 이렇게 울컥해지기까지 한 것이다. 넌 어디로 갔을까? 그 동네에서 같이 놀던 친구들은 어디에, 내게 말 걸어주시던 동네 어르신들은, 젊디 젊은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디에 있을까?...

‘아차 오늘 병원 예약한 날이지. 지금 몇 시지? 서둘러야겠어.’

토끼에게 앨리스처럼 나를 데려다 달라고 말하기도 전에 벌써 현실로 돌아왔다. 찬바람을 맞으며 구천면로가 아닌 다른 길을 걸으면서 괜히 벅차올랐다. 왠지 이야기보따리 첫 매듭 하나 푼 느낌이라고나 할까. 이번 이야기는 귀하고 의미 있는 기억을 떠올리기 위한 마중물이라고 해두어야겠다고. 그 기억의 장면들을 하나하나 만날 준비나 해두어야지. 그러자 그 이야기 속에 나올 수많은 주인공들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내 가슴은 설레기까지 하였다. 무수히 쏟아지는 기억의 별들이 하나하나 떠올라서, 이미 내 가슴은 빛나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이제는 그곳과 만날 준비가 되어 가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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