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이혼. 2
2.
2016년 11월의 마지막 주. 나는 출산을 했다.
이 문장에 기나긴 고통의 미사여구가 붙지 않는 까닭은 임신 기간이 그랬듯 출산 과정 역시 '그럭저럭 견딜만한 수준' 이었기 때문이다. 진통은 물론 아팠지만 숨이 넘어갈 정도는 아니었다. 몇시간 후 숨이 점점 넘어갈 정도가 되자 마취과 의사가 나타나 무통 주사를 등 한가운데 꾹 눌러주었고, 고통은 또 그럭저럭 견딜만한 수준이 되어 그 후로 몇시간을 넘치지 않고 뚜껑만 들썩이며 끓어댔다. 한밤에 시작한 진통이 해가 뜰때까지 이어지고, 소위 주사빨로도 못 견디겠다 싶은 한계가 찾아왔을 즈음, 짜잔. 아이가 태어났네요? 왕자님입니다.
간호사들은 눈도 제대로 못뜬 핏덩이를 대강 감싸 내 품에 안기더니 대뜸 병원복을 훌렁 들어 젖을 먹이라고 했다. 가족 분만실 한편에 벌 서는 어린애처럼 우두커니 있던 남편을 손짓으로 불러다가 아이 이마에 뽀뽀를 하라고 시키기도 했다. 그렇게 첫 생명 탄생을 애틋해하는 부부의 극적인 모습을 연출한 뒤, 이 '가족적'인 모습을 사진으로 몇장 찍어주었다. 탄생의 순간은 분명히 기록할만한 것. 그러나 나는 이런 식의 기록이 되리라고는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연출 후 찰칵이라니. 하기야 연출하지 않고 그럴싸한 사진을 찍으려면 수천장의 스냅샷을 눌러야 할테니, 그들의 그런 연출-어깨에 손 올리시고! 이마에 입 맞추시고!-이야 지극히 합리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나와 남편이 그런것에 영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데 있었다. 숙달된 헬퍼들의 일사천리에 적응을 못하고 어색해하는 우리의 성정은 결혼식 사진을 찍을 때부터 진즉 드러났었다. 쇼맨십이나 끼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 우리는 결혼식장에서와 똑같이 스탭들의 프로페셔널한 진행에 어영부영 버벅이며 연기를 했고, 동시에, 이 어색한 가족씬이 제발 좀, 빨리, 지나가기만을 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아이가 태어나던 시각 찍은 사진을 보면 그렇게 우스꽝스러울 수가 없다. 싸개로 칭칭 감싼 빨간 원숭이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있는, 조악한 연기 실력의 배우 두 명. 어떻게 봐도 감격에 젖은 엄마 아빠로는 보이지 않는다.
아이가 태어난 것은 스물 아홉의 늦가을. 부모가 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기엔 너무 이른 나이였을지도 모른다. 흔히들 말하는 철이 덜 든 나이. 하지만 당시 스물 아홉의 나에 비해 지금 서른 넷의 내가 크게 성숙하지도 철들지도 않은 것을 보면, 어쩌면 준비라는 건 영영 안 되는 것일 테다. 생애 대부분의 순간이 그렇듯이. 그저, 준비가 그럭저럭 되어 있는 척, 능히 해낼 수 있는 일인 양 의연한 척하며 내 앞에 놓인 생의 다음 장면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비록 그 씬을 이끌고 나갈 내 연기 실력이 형편 없더라도 말이다.
아이의 세계 → 학생의 세계 → 직장인의 세계 → 부부의 세계 → 그리고 엄마의 세계.
부부의 세계, 그러니까 유부녀의 세계까지는 <나의 이상형>을 다이어리에 끄적끄적 찌끄리던 열몇살 무렵부터 간혹 상상했던 것이었으나. 엄마의 세계같은 건 꿈에서도 상상해본 일이 없었다. 나는 내 '사랑'을 갖는 것이 꿈인 적은 있었어도 화목한 '가정'을 갖는 것이 꿈인 적은 단 한번도 없던 미친 낭만파였으니까. 사람을 만나면 한달을 못 가던 내가 남편과 스물 셋에 만나 나름대로 긴 연애를 하고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만난지 겨우 한달만에 <30살까지의 인생계획>을 PPT로 만들어와 내 앞에서 브리핑하던 지독한 계획돌이였기 때문이다. 나는 당장 내일 일도 궁금하지 않은데 당시 나이 23살에 자기 나이 30살까지의 계획을 년단위로 세우고 있는 남자를 보는게 얼마나 기막히고 재미있었던지. 지금에 와 생각해보면 어떻게든 나를 꼬셔보겠다는 의지가 8할인 맹랑한 행동이었으나 어쨌든 그 이면에는 착실함과 추진력이 엿보였으므로 그것이 마냥 싫지 않았다. 그 목표에 기꺼이 편승해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가정이 아니라 사랑이 꿈이던 미친 낭만파인 나는, 나와 언젠가 가정을 꾸리기를 원하는 이 패기뿐인 스물 세살짜리 남학생을 믿고 끌려가 주었다.
지금은 기억이 흐릿하지만, 남편이 당시 적어둔 보고서엔 '27-28살에 너와 결혼.', '29살에 너 닮은 딸 하나.'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러니 그는 23살에 세운 자신의 목표를 어느 정도 이룬 셈이다. 우리는 스물 여덟에 결혼했고, 스물 아홉에 아이를 낳았으니까. 비록 딸이 아니라 아들이라는 게 최초의 목표와는 다른 점이었겠지만.
그리고 나는 여기가 시초라고 생각한다. 아들을 낳고 나서, 남편이 자신의 최초 목표와 달라진 점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이. 그 스물 아홉의 늦가을. 아들이 태어난 그 순간이,
남편과 내가 아주 다른 길을 걷게 되는 가장 최초의 지점이다.
대개 한집 건너 한집 꼴로 그런 말을 한다. 결혼 생활은 알고보니 연애와 판이하게 다르다고. 남편은 결혼을 하자마자 '변했다.'고. 물론 내 가정도 그랬다. 스물 셋에 패기 넘치고 착실해 보이던 이 계획돌이도 물론 '변했다.' 홀로 자취할 땐 나보다 더 깔끔하게 해 놓고 살던 집이었건만 결혼 후엔 무엇이든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으려 함은 물론, 어쩌다 다투기라도 하는 날에 '이럴 거면 결혼을 왜 했냐?' 쏘는 내게, '혼자 자취하는게 지겨워서 했다', '불꺼진 집에 들어오는 게 싫어서 했다'는 말도 서슴지 않고 뱉었다. 겉으론 아닌 척 했지만 속으론 결혼 후에도 여전히 미친 낭만파였던 나는 '너라서 결혼을 했다'가 아니라 '혼자 살기 지겨워' 결혼을 했단 말이 상당한 충격이었지만. 어쨌든. 결혼을 하니 '변했다.' 는 것은 나와 가정을 꾸려버린 이 남자에게도 어느 정도 해당 되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제 대개의 여자가 알고 있을 연애와 결혼의 진실 하나. 결혼을 해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연애를 해서 변하는 것이라는 것. 남자는 연애를 해서 잠시 변했다가 결혼을 하면 본연의 성질로 돌아오는 것뿐이다. 연애 때는 다들 그렇다. 그때야 가질 수 있다면 뭔들 못하겠는가? 여자가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할 수 있는 것이지. 대 연애시대를 넘어 결혼 후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온 남편을 대단히 힐난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변했다'는 말은, 적어도 이 가정의 경우엔 내게 더 적합한 말일 테니까.
앞서 말했듯 그 지점이 시초였다. 남편과 내가 다른 길을 걷게 되는 최초의 지점, 스물 아홉의 가을에 아들이 태어난 것. 나는 아들이 태어난 후 변했다. 스물 세살에 만나 스물 여덟에 결혼하기까지. 남편의 목표와 의지대로 군소리 없이 그의 인생 계획대로 끌려가 주던 연애 시절의 그 행동을, 딱 청산해버린 것이다. 그렇게 변했다. 나는 이제 부부의 세계를 지나 엄마의 세계로 휩쓸려갔다.
이 녹록치 않은 엄마의 세계를 직면한 것은 산후조리원에서부터였다.
산후조리원=휴양지라는 선배 어머니들의 입이 마르고 닳는 말들을 굳게 믿어왔던 터였다. 그러나 나에겐 그 공식이 들어맞긴 글러먹었다는 걸 입소 첫날 깨달았다. 결혼식장이나 분만실처럼, 조리원에도 숙련된 조교들이 포진해 있었다. 그들은 내게 '초유를 먹이는 것이 왜 중요한지' , '모유수유가 아이에게 얼마나 좋은지' , '산모에게 좋은 음식과 피해야 할 음식' 들을 구구절절 가르쳐 주었고, 직수를 쉽게 하는 자세, 수유 후 트름을 시키는 법, 기저귀를 쉽게 교체하는 법 등을 하나부터 열까지 알려주었다. 지나가는 사소한 정보조차 반드시 체득해 내 아이에게 해 주어야할 것 같은 거대한 숙제로 느껴졌다. 물론 체득은 단번에 되지 않고 실수 연발이라 종종 자괴감이 들었다. 그것 뿐인가. 내 의지대로 되지 않는 일들은 그 외에도 널려 있었다. 아이는 젖을 잘 물지 못했고, 그래서 몸무게가 빨리 늘지 않았고, 신생아 황달 수치가 쉽게 떨어지지도 않아 회진하는 소아과 의사를 갸웃하게 만들었다. 출산과 동시에 아들은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갔지만 나는 이 아이를 아직 독립적인 개체로 인정할 수는 없었다. 아직 심정적으론 내게 속해 있는 개체를 내 능력으로 호전시킬 수 없다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니. 나란히 태어난 아이들 사이에서 우리 아이 홀로 말라가는 것을 볼 때마다 무력감이 들었다. 신생아 황달이야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고 점차 없어진다는 말을 들어도 한번 발동한 불안증은 쉬 가시는 것이 아니었다.
매몰되어 있지 않으려면 아이를 걱정하는 시간을 줄여야했다. 일명 여유 없는 첫애 엄마파였던 나는 조리원에서 결코 그냥 쉬지 않았다. 매일 계획되어 있는 특강 시간에 죄 참석해 각종 육아법을 들었다. 나중엔 이게 홍보인지 교육인지 다시 홍보인지 모를 정보까지 일단 필요할지 모르니 새겨들었다. 들으면 들을 수록, 갓 태어난 내 아이를 위해 해주어야 할 것이 너무 많은 것 같아 조급증이 일었다. 그땐 무엇을 걸러 들어야 하고 무엇을 새겨 들어야하는지 판단하기가 힘들어 그러했다고, 이제와 늦은 변명을 해 본다.
서울에서 회사를 다니고 주말에만 겨우 지방의 조리원으로 내려올 수 있었던 남편은 조리원에 도착하면 일단 내 침대에 드러누워 한잠 자기 바빴다. 내 비위를 맞춰주려 든다거나, 태어난 아이가 예뻐 어쩔 줄을 모른다거나, 하는 행동은 전혀 없었다. 대자로 자지 않을 때는 게슴츠레 눈을 뜨고 하품하기 바쁜, 드러누워 핸드폰하기에 여념이 없는 이이가 딱히 남편 같지도 아이 아빠 같지도 않았다. 그도 피곤했으려니 하는 이해심이 생겨날 여유가 없었다. 하물며 서운을 토로하거나 잔소리를 해도 쉽게 행동의 변화로 이어지는 타입도 아니었다. 체념은 빨랐다. 나는 하등 의지도 도움도 안 되는 남편을 어떻게 해 보려는 생각을 버렸다. 그 사이에 내가 발 딛고 나아가야 하는 엄마의 세계나 가늠해보기로 했다. 조리원으로 각종 육아 서적을 시켰고 핸드폰으로는 육아 정보를 뒤졌다. 때마다 받는 수유콜에 뛰어나가 아이를 안고 안 되는 직수를 계속 시도했고 황달 수치가 자꾸 오른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몰래 화장실에 틀어박혀 훌쩍였다.
그러니까, 그때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만난 세계에 풍덩 빠져 질식하기 직전이었다. 그 세계는 바닥이 없었다. 만 28년간 내 상상의 영역 밖에 있던 엄마의 세계가 이런 것이라니. 청소녀같은 마음가짐으로 이십 몇해를 살아오며 단 한번도 상상조차 못 해본 그곳은 알면 알수록 너무나 길고 깊고 끝간데 없었다. 겨우 얼기설기 엮은 어설픈 돛단배 한척을 가지고 파도가 3m씩 굽이치는 육아의 대양을 최소 20년은 건너야하는 일이었다. 까마득했다.
내가 그러면 남편은 도대체 왜 이렇게 종종거리는지 알 수가 없다는 식으로 나를 기이하게 보며 한 마디를 툭 던졌다.
"뭐가 문제야? 왜 그래 도대체?"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그 전까지 툴툴댈 지언정 그럭저럭 자기를 잘 따라주던 여자가 대뜸, 땍땍 잔소리를 늘어놓거나 한심하기 짝이 없다는 얼굴을 하고 바라보다니. 남편 입장에서 벼락같이 변한 것은 그 자신이 아니라 아내인 나였을 것이다. 변할 수 밖에. 뱃속에 품고 있을 때까지는 나 뿐이었는데 낳고 나니 나와 아이 둘이 되었는데. 나는 그제야 엄마였다. 아이를 임신한 스물 아홉의 이른 봄이 아니라, 늦은 가을에야 비로소 나는 엄마가 된 것이다.
엄마가 된 나는 도무지 아버지 모드로 바뀌지 않을 것 같은 남편을 개조하는데 괴롭게 에너지를 쏟지 않기로 했다. 일단 내 발 앞에 놓인 이 아득히 먼 세계에 적응부터 해야 했다. 바닥조차 보이지 않는 이 망망한 엄마의 세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