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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호 Aug 12. 2024

스물 여덟, 선택지가 없는 줄 알았던 날들

어쩌면 이혼. 1
















0.



2021년. 서른 넷의 봄.

나는 이혼을 결심한다.







.





1.




2010년은 내가 스물 셋이 되던 해였다.

그 해 봄은 나와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 몹시 혼란하고 아픈 계절이었다. 직전 해의 여름, 불의의 사고로 가족 중 한명이 세상을 떠났으니까. 

집안의 막내로 태어나 열세 살때도 스물 세살 때도 늘 세살짜리 같은 취급을 받으며 철없는 권리를 누렸던 대가로, 나는 집안의 막내로서 그 시기 가족들에게 필요한 활력을 불어넣을 의무를 졌다. 가족에게 닥친 위기를 농담과 웃음으로 덮고, 산 사람은 살아야하니 그럼에도 즐겁게 지내자는 요지의 철없는 재롱을 떠는 것으로 말이다. 그러나 가면 뒤의 얼굴까지 나이브하리란 법은 없었다. 홀로 방안에 틀어박힌 초상은 종종 갈피를 잃고 우울했다. 드러내놓고 애도할 기회를 스스로 박탈한 뒤 숨죽여 앓는 것밖에 못하던 스물세살은 그렇게 미련했다. 어둡고 버석거리던 스물 셋의 봄. 그 봄은 언제고 어느때고 겨우 세살같은 취급을 받고 자라온 내가 마땅히 감당할 만한 계절이 아닌 것 같았다.

그때 내가 짊어지고 있던 것들을 약간이나마 내려놓을 수 있는 대상이 훗날 내 남편이 된 사람이었다.

우연히 만나 내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고, 필연처럼 기대게 된 사람. 같이 있으면 즐거웠고, 그 앞에서는 가면을 쓰지 않아도 괜찮았고, 닥친 현실을 잊을 수 있어서 괜찮았고, 불안을 곱씹지 않아도 괜찮았던 그 연애는 그렇게 시작 되었다.


철없는 시절 대개의 연애가 그렇듯 우리는 장담할 수 없는 미래를 약속하는 것으로 행복을 느꼈다. 서로의 미래를 확신할 수 없었던 시기. 그럼에도 함께 있으면 불투명한 포장재로 겹겹이 가려진 미래가 조금 투명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두터운 비닐 너머로 흐릿한 형체의 미래가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런 느낌을 갖게 하는 상대였다.


"나는 졸업하고 취업해서 직장을 다니고, 너는 결혼하고 근무처를 서울로 옮기면 되잖아."


2011년 봄. 교사 임용 후 지방의 학교에서 근무하고 있던 나는 그의 제안을 지극히 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현실적으로 그것이 쉽지 않음을 알았음에도―1)그의 취업이 언제 이루어질지 알 수 없다 2) 내가 근무지를 서울로 옮기는 것도 쉽지 않다―당시 스물 너덧, 우리가 앞으로 무엇인들 못하랴는 자신감을 갖기에 충분한 나이였고. 그 막연한 희망은 관계의 불씨를 쉬이 꺼뜨리지 않았다.

2010년에 만나 2015년에 이르기까지 5년. 그 5년의 연애기간 동안 우리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많지 않았다. 그는 본인 말대로 일사천리로 취업에 성공했고, 나는 서울로 근무지 교환을 할 수는 없었으나 서울에서 출퇴근이 가능한 지방으로 근무지를 옮기는데 성공했다. 연애의 시작과 동시에 약속하던 미래가 현실이 되었으니 더 이상 결혼을 미룰 이유가 없었다. '벌써 결혼이야? 스물 여덟에 결혼은 빠르지 않아?' 묻는 지인들에겐 '이제 우리 관계에 남은 게 결혼 뿐이야.' 라는 대답을 종종 내놓았다. 그랬다. 그때 내 앞에 놓인 선택지는 사지선다 삼지선다도 아닌 OX 퀴즈라고 생각했다.


이 사람과 결혼을 하시겠습니까? (O / X)


퀴즈의 정답으로 O 버저를 누른 것은 둘 다였다. 그래 우리 결혼하자. 혼담이 오감과 동시에 상견례, 날짜 잡기, 식장 선정, 스드메, 웨딩 촬영, 신혼 집, 그리고 혼인신고까지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속도가 빨라 다툴 틈도 없었다. 준비 기간 동안 크고 작게 마음이 상하는 일이야 있었던 것도 같지만. 그것이 쾌속으로 진행 중인 결혼을 뒤엎을 정도로 중차대한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2015년의 6월. 우리는 웨딩 마치를 올리기에 이르른다. 식이 치뤄진 당일날 저녁 지체 없이 신혼여행지인 하와이로 떠나기까지 했으니 그야말로 모든 것이 쾌속이었다.

그때 우리가 좀 더 예민하고, 좀 더 사소한 것을 참을 수 없어하는 성격이었다면 그 6월에 함께 버진 로드를 걷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둘 다 큰 소리 내며 싸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서로의 극렬한 다름을 발견해도 그럭저럭 싸움 없이 지나가곤 했다. 5년의 연애. 그 시간을 지나오는동안 발견한 서로의 다름을 최초 2년까지는 '색다른 매력'으로 보았고, 이후 3년은 다소 짜증스러워도 '견딜 수 있는 수준'이라고 생각하고 넘겨버렸다. 다름은 말 그대로 다름이지 틀림이 아니라는, 어느 아동 교육학 책에서나 볼법한 온유한 사고 방식을 콩깍지로 쓰고 결국 혼인신고서에 도장을 꽝.


다름은 다름일 뿐 틀린 것이 아니다.


평탄한 연애의 산물이었던 그 온화한 사고방식이 변한 것은, 우리 사이에 아이가 생긴 다음부터였다.


2016년 3월. 임신.

2016년 11월. 출산.


그해 3월부터 11월까지, 만 10개월의 임신 기간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그럭저럭 견딜 수 있는 수준.'

열달 내내 물만 마셔도 발끝까지 게워냈다는 떠도는 임신 무용담 중 하나처럼 입덧이 심했던 것도 아니고. 손톱 끝까지 퉁퉁 부푸는 임신 중독증에 걸린 것도 아니고. 임신 당뇨에 걸려 매번 스스로 채혈하고 혈당을 재는 피곤한 생활을 해야 했던 것도 아니고.. 최소한 내 몸은 그럭저럭 견딜만한 수준이었다. 불편하지만, 그래도 남들에 비하면 이 정도는 괜찮지.

그때를 떠올리면 제일 먼저 머리에 튀는 이미지는 신혼집의 조그만 패브릭 소파다. 비교적 이른 퇴근 후 남편이 귀가 전인 초저녁에 내가 귀가하면 제일 먼저 눈에 보이던 그 소파. 그 다음엔 소파에 앉아 눈에 안 들어오는 책을 태교라도 해보겠답시고 꾸역꾸역 읽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 사이 종종 잠이 들었다 깨었고, 잠이 들었다 깨어도 남편은 귀가 전이었다. 당시 실적에 매달려야하는 회사에 다녔던 남편은 늘 바빠 평일엔 자정 근처 귀가가 예사였다.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주말에라도 마주 앉아 뱃속 아기에게 아빠 목소리 좀 들려주라며 책을 읽어주라고 강요하면 영 쑥스러운지 몇자 읽어주는 시늉을 하다 금방 그만두곤 했다. 고된 평일의 업무를 보상받으려는 듯 남편은 그 패브릭 소파에 붙박은듯 자주 누워 있었다. 그 사이 집안 일은 누구의 몫도 아니었다. 나는 청소, 설거지, 빨래 등등의 자질구레한 집안 일이 임신한 내 몫은 아니라고 생각하려 애썼고, 남편은 신혼 초기 때부터 쭉 자기 몫의 집안 일은 오롯이 빨래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설거지는 자주 쌓였고 청소기도 제때 돌리지 않는 집안은 자주 무언가 밟히고 굴러다녔다. 나는 짜증을 내다 지쳐 대강 치우는 척 했고, 남편은 꼼짝 않고 소파나 침대에 누워 TV를 보았다.


우리는 주말이면 비좁은 우리 안에 갇혀 있어야 하는 사이 나쁜 개 두마리처럼 굴었다. 그렇게 주말 오전을 꼬박 보내고 나면 오후엔 짜증도 지겨워져 드러누워 있는 그를 들들 볶아댔다. 우리 외식하자. 우리 영화 보러 나가자. 그때 TV에 나온 그 맛집 가자. 아 나가려면 좀 빨리 씻어봐. 왜 이렇게 늑장을 부려? 해 다 지겠어. 나 벌써 피곤해. 소파에 몸이 늘어지는 사람을 다그쳐 겨우겨우 외출을 성사시키고 나면 그때부턴 진이 빠져 나들이에 나서도 둘다 별로 즐겁지 않았다. 무거운 몸을 하고도 외출이 즐거운 나와 달리 나만큼 주말 나들이가 즐겁지 않은 그. 나는 그런 남편에게 짜증이 나고, 내게 볶이다 못해 나온 그의 얼굴에서는 피곤이 떨어지질 않고...


'결혼하면 다 이런 걸까?'

'임신하고나면 다들 이런 생각을 하는 걸까.'

'내가 남들보다 시간이 많아서, 남들보다 몸이 덜 힘들어서 이렇게 한가한 생각을 하는 걸까.'


자주 들던 의문은 임신 후반부로 갈수록 의문이 아닌 자기 암시가 되어갔다. 다들 그렇겠지. 내가 남들보다 힘들지 않아서 이런 생각이나 하는 거겠지. 그렇게 가끔 쓸쓸하고 종종 불편하던 그 10개월은, '그럭저럭 견딜만한 수준' 이었다.


다만 행복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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