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 무한대를 더 이상 나눠지지 않을 때까지 쪼개면 남는 최소한의 입자 개념인 모나드를 떠올려 봅니다. 물리적인 쿼크나 원자 수준이 아닌, 그보다 더 쪼개어버린 입자는 추상적인 개념입니다.
문화예술의 바람이 불던 날 범우주적인 어떤 부름으로 그림 무식한 저는 모나드에 입성했습니다. 더 이상 쪼갤 것조차 없는 그림에 대한 기법은커녕 그림 재료에 대한 간단한 상식조차 깜깜한 상태였습니다. 유화란 빛의 화가 20세기 최고의 화가라 일컫는 빈센트 반 고흐의 해바라기 정도로만 알고 있었으며 유화물감을 직관한 적도 만져본 적도 없었습니다. 그런 제가 그림 전시회 관람객인 수동태가 아닌 전시 작가(?)란 호명을 듣는 능동태가 될 줄 감히 상상이나 했을까요.
모나드는 깨알 같지만, 그 파문의 힘은 해일 못지않게 제 일상을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보고 그리는 낙서라 쓰고 스케치라 읽고 싶은 밑그림은 보통의 범주 안에 들어갑니다. 더 나아가 색감을 입히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잘 나가던 카누의 물결이 갑자기 잦아듭니다. 어쩌면 정지신호에 걸린 자동차가 급브레이크를 밟은 순간의 모습입니다. 모나드의 기운은 관성의 법칙에 순응합니다.
그저 바라만 봐도 흐뭇한 그림들, 도저히 따라갈 수 없어 멀리서 보기만 해도 그저 좋은 그림들이 친근하게 말을 겁니다. 고흐는 영혼의 편지를 낭독하고, 모나드의 바람을 타고 날아온 씨앗을 받아 내 눈에 잠겨 놓고 요리조리 살펴봅니다. 이를 어찌할까. 마음은 벌써 식물원을 가진 듯하지만 갈 길이 멉니다.
나는 날마다
모든 면에서
점점 좋아지고 있다.
_ 에밀 쿠에
쥐구멍에도 볕 뜰 날이 옵니다. 아직 목표한 골인 지점까지는 여정이 험난할지도 모릅니다.
바람이 불지 않으면 앞으로 내가 달려 나가면 됩니다. 바람개비는 그때 내 심장의 박동을 등에 업고 앞으로 돌려 나가기 시작합니다. 지금 저는 식(植) 자 무식한 초짜라서 무식하게 앞으로 먼저 달려 나가는 중입니다. 잘게 부서지는 모래알처럼 혹은 바위에 스스로 부딪혀 잘게 부서지는 물방울처럼 바람 앞에서 가끔은 기침을 콜록거립니다.
때로는 무너져도 괜찮아
무너지면 다시 세울 수 있잖아
_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2010
천천히 알아가는 식물의 세계, 조금은 게으른 초짜 곁에서 바람의 편지를 소리 없이 읽어주며 흔들리는 라벤더와 돌아서 저미는 가슴 한 칸에 바람을 묻고 등 뒤에서 조용히 그러나 쉬지 않고 따라오는 토마토 군단이 사랑스럽습니다.
또, 이목이 쏠리는 토마토 연인 한 쌍은 마치 사랑을 몸소 이미지화하여 창작의 씨앗인 모나드로 거듭난 듯합니다. 어떻게 보면 연리지의 작은 버전 같기도 합니다. 사이좋게 햇살을 나누고 영양소와 물방울을 주거니 받거니 차담을 나누듯 정겹기 이를 데 없습니다.
무료한 일상의 루틴 속에서 조석으로 베란다에서는 일대 혁명을 일으키면서도 요동치는 마음을 오히려 잔잔하게 만드는 도시의 초록한 신호등이 반짝입니다. 언제든 건너가라고 언제든 앞으로 나아가라고 일러주는 나만의 청신호입니다. 오월의 신록이 가득한 계절의 여왕도 호위하듯 지금 베란다 바깥 또한 녹색의 향연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아파트의 혁명은 작지만나의 베란다의 초록한 꿈들이 폭발하듯 용솟음치고 있습니다.
뜨거운 열정보다 중요한 것은
지속적인 열정이다.
_마크 주커버그
처음 얻은 모나드인 라벤더 씨앗으로 시작된 식자도 모른 순진무구했던 초보의 올 5월의 베란다는 혁명의 불꽃들이 타올라 모닥불이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없어 휑하기 그지없어 발길이 뜸했던 공간이 요렇게 변모하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불 멍, 물 멍도 좋지만 초록한 포만감을 주는 식 멍이 끝내줍니다. 식 멍 끝엔 정서만 남지 않습니다. 열매란 과실과 향기 그리고 신선한 한 끼 식재료까지 한 끼 초록한 밥상이 푸짐합니다.
저의 베란다의 변화가 어떤가요? 이만하면 가히 모종삽 놓고 식자 무식했던 베란다 혁명이라고 칭할 만한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