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후 Jun 17. 2024

아프니? 난 더 맘이 쓰여!

아픈 만큼 기쁨은 두 베란다

정담,   산책할래?



햇살과 구름이 포옹하는 사이에


햇살을 점점 눈이 부시는데 하릴없이 오후만 되면 시들해져서 몸도 마음도 축 늘어집니다. 야행성이라 자정이 오기 전엔 말똥말똥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자정이 되기 전 피로도가 급격히 상승하는 것을 느낍니다. 이런 와중에도 참 다행인 것은 주인과 달리 토마토 군단은 발육 상태가 아주 좋습니다. 가슴이 커지고 사랑도 커지면서 노란 꽃을 앞다투어 피고 있습니다. 사랑은 한 만큼 토마토 군단은 융성해집니다. 꽃이 하나일 때 신기했는데, 며칠 사이에 누가 물수제비를 뜬 듯 꽃도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쌀뜨물이 아무리 좋다고 한들,


여름이 불의 날개를 펴고 나서 베란다의 체온도 상승했습니다. 기초 체온이 1도가 상승하면 면역력이 좋아집니다. 올해는 특히나 황사도 없었고, 제때 단비까지 적당히 와준 덕분에 식물들이 신이 났습니다. 꽝 손인 저도 이에 덕을 좀 봤습니다. G마켓에서 받은 씨앗인 라벤더와 토마토가 쑥쑥 자라 이제는 어엿한 고등학생이 되었으니까요. 지구별을 수호하는 선발대 일원이 된 저는 쌀뜨물의 효능을 어찌 알게 되었습니다. 이에 습득한 정보를 적극적으로 반영하여 베란다의 자라나는 새싹들에게 실천 휴머니즘을 발휘했습니다. 놀라운 정보력이었습니다. 영양제를 하나도 맞지 않았는데도 잘 자라 줍니다. 이에 밥을 짓는 일이 재미가 붙었습니다. 쌀을 씻어야 쌀뜨물을 구할 수 있으니까요. 이틀에 한 번 또는 사흘에 한 번 쌀을 씻은 물을 담아 보관하고 그 물을 토마토와 라벤더에게 먹였습니다.


이건 너무하네요.


문제는 막 이글거리기 시작한 태양의 눈에 있었습니다. 제 베란다는 남향이라 빛이 잘 들어옵니다. 비타민 디는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이곳에 있으면 결핍은 문제가 발생할 일이 없습니다. 아침에 출근했다 귀가하면 옷을 갈아입기도 전 베란다로 직행합니다. 하루를 잘 보냈는가 안부가 궁금한 토마토와 라벤더에게 저의 귀가를 보고합니다. 그런 다음 온종일 햇볕에 노출돼 목이 마르진 않았는지 살피는 것도 잊지 않습니다. 시원하게 샤워를 시키고 목도 축여줍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화분의 흙 표면에 왜 쌀뜨물이 몰려있는 걸까요? 다른 날은 모여있지 않았거든요. 뭔가 모여있다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랍니다. 문제가 발생했다는 조짐이거든요.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뭐, 괜찮겠지! 별일 없을 거야.’란 생각으로 평상복으로 갈아입으러 갑니다. 분리수거를 좀 하고 낮 동안 일하느라 보지 못했던 사회 관계망 서비스도 돌아봅니다. 어지간히 시간이 경과했습니다. ‘좀 시들한 모습이 좀 사라졌나, 가서 한번 말 좀 걸어볼까?’ 베란다로 향합니다.


어라? 상상했던 그 모습이 아닙니다. 여전히 시들한 듯싶습니다. ‘이상하네, 왜 활짝 웃지를 않는 걸까? 얘들아, 어디 아픈 거니?’ 나의 식물들이 꽤 노곤했나 봅니다. 아직 한밤중은 아닌데 벌써 잠든 것 같군요. ‘잘 자라, 낼 아침엔 생생하게 만나자.’ 인사를 하고 쌀뜨물이 바닥을 보이는 병을 집어 들고 세척하러 수돗가로 갑니다. 뚜껑을 연 순간 뭔가 이상함을 감지합니다. ‘이건 무슨 냄새지?’ 그에게서 낯선 향기가 느껴지면 우리는 압니다. 바람이라는 것을요. 요건 향기라기보다 냄새에 가깝습니다. 맡고 싶은 향기가 아닌 막고 싶은 냄새군요. 아, 그렇군요.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이런 제가 방심했습니다. 아 글쎄, 쌀뜨물이 상한 겁니다. 날씨가 데워진 만큼 쌀뜨물도 곡물이라 이거군요. 부패가 진행된 겁니다. 세균이 번식하고 그래서 거품이 모여들어 화분의 흙 표면에서 패거리가 된 거군요. 너무 늦지 않게 실수를 바로잡을 수 있어 참 다행입니다. 맑은 물을 받습니다. 어리석은 주인이 상한 식수를 주곤 피로한 줄 알았다니 참 미안하네요. 맑은 물을 듬뿍 먹여서 뱃속에서 그 상한 물을 내보내야겠습니다.


친구들아, 미안해. 어서 기운을 회복하렴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 실수를 인정하고 진심으로 사과하는 마음을 받아주는 성숙한 자세를 가진 베란다 식구들, 복통을 견디며 설사를 한 하룻밤이 무사히 지나갔습니다. 일찍 눈이 떠지고 베란다에 전광석화처럼 다가가 앉습니다. 와, 더 예뻐지고 튼실해졌군요. 밤새 스스로에 힘을 믿고 정신력을 기르더니 마음의 근육까지 살찌웠나 봅니다. 피부에서 반짝반짝 광이 납니다.

고마워, 잘 이겨내 줘서.


덕분에 실수한 만큼 나도 성숙해졌어.

매거진의 이전글 흑기사의 페르소나를 들쳐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