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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열병처럼 찾아오는 순진무구병

아이가 열이 나도 다음 날 아침은 밝아오고

by 은호씨

지난 주말, 딸아이가 열이 났다. 전 주에는 내가, 그 전 주에는 남편이 독감 진단을 받고 링거 신세를 졌기 때문에 어쩌면 기다리고(?) 있었던 일이었는데도 역시나 달갑지는 않았다. 아이만은 그냥 넘어가길 그렇게 빌었는데, 슬픈 예감은 항상 틀린 적이 없다.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교차 복용할 해열제를 챙기고 따듯한 보리차를 끓이다가 문득 이런 말이 툭 튀어나왔다.


“오빠가 백만 더 벌어왔으면 좋겠다.”


생각의 흐름은 이러했다. 두 달에 한 번은 열이 펄펄 끓던 영유아 시절은 지났으니 괜찮을 것이라며 일을 시작하긴 했지만, 늘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그래도 맞벌이가 낫다며 5인 미만 사업장에 계약직으로 취직했는데, 역시나 연차는 턱없이 부족했다. 아이 방학과 아플 때를 대비하여 연차를 남기면, 나를 위해 온전히 쉴 수 있는 시간은 반나절도 채 되지 않았다. 곧 있을 겨울 방학을 위해 올해 연차를 아껴두었는데, 다음 주에 결국 써야 하는 건 아닐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이 나왔던 것이다.


멍하니 있는 남편의 얼굴은 마치 봉변을 당한 것 같았다. 조금 헛웃음을 짓더니, 나에게 ‘속물’이라고 하는 게 아닌가! 물질적인 것에 초연한 사람이 되자고 매년 스스로를 독려하는 나는, 그 단어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아이가 아프면 부모들은 조금 예민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런 것이려니 넘기며, 그저 장난스럽게 넘어가기로 했다. 갈등을 만들지 않으려는 나름의 방법이다.


“어머, 속마음인데. 들렸어?”


그래도 ‘속물’이라는 표현은 좀 심했다며 말하는 나에게 남편이 말한다. 내가 변했다며. 원래의 나는 ‘번 만큼만 쓰면 된다’고 말했던 사람이었다며.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결혼한 뒤 남편이 자신의 월급 통장을 쥐어주며 경제권을 일임했을 때였을 것이다. 뭔가 미안한 표정으로 본인의 월급이 ‘적다’고 말하기에 내가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또 한 번 깨닫는다. 난 정말이지, 순수한 사람이었군.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남편의 월급이 결코 적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단돈 만 원 한 장, 주 5일을 빡빡하게 일하며 최저임금을 받기도 얼마나 어려운가! 돈벌이가 얼마나 치사하고, 힘들고, 버거운지 잘 안다. 더구나, 한 분야에서 20년 이상 일한 남편은 얼마나 많은 더러운 꼴을 봤을까. 그 세월을 나는 감히 짐작할 수도 없다. 그래서 본인이 버는 돈이 항상 적을까 걱정하는 남편에게 그런 티를 내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다만, 그때와 내가 달라진 것은 ‘아이의 출현’이다. 아이가 없을 때는 씀씀이를 줄이기가 어렵지 않았다. 돈이 부족하면 적게 먹고, 약속을 줄여서 외출을 하지 않았다. 사고 싶은 물건이 있으면 더 뒤로 미루었고, 조금 두문분출하면 그만이라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아이가 생기고 난 뒤에는 뭔가 그 마음이 달랐다. 남들이 다 하는 것을 해주지 못하면 미안했고, 집이든 옷이든 적어도 중간만은 했으면 하는 마음이 자꾸 솟아났던 것이다.


물론 모든 기준은 집집마다 다를 것이다. 누군가는 한 끼는 가족이 다 같이 집 밥을 먹어야 한다고 할 것이고, 누군가는 그래도 뭐니 뭐니 해도 경제적으로 풍족해 1년에 한 번은 해외여행을 가야 한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또, 누군가는 가족이 함께 하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니 주말마다 캠핑을 가자고 할지도 모를 일이다. 이제 막 3인 가족이 된 지 6년 차에 접어드는 우리는, 아직 우리 가족만의 ‘기준’을 찾는 시행착오를 거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남편에게 아로새겨진(?) 순수한 시절의 ‘나’는 아직도 내 한편에 남아있기는 하다. 하지만 ‘엄마’라는 타이틀이 새로 생긴 만큼, 할 수 있다면 좀 더 벌어서 풍족하게 살고 싶은 ‘나’도 여기 있다. 거기다 요즘에는 ‘워킹맘’처럼 멋지게 입고 아이가 원하는 것을 하나 더 사주고 싶은 ‘나’와 ‘전업맘’처럼 아이의 세세한 변화를 금방 알아차리고 모든 행사에 참여하고 싶은 ‘나’도 있다. 이 모든 것에 여전히 욕심내고 있다니. 나는 참 아직도 순진무구한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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