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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선의에 기대면 안 되는 걸까

선의와 악의가 싸우면 누가 이기려나

by 은호씨

나에게는 습관이 하나 있다. 학비를 번답시고 오래 했던 서비스직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그 어떤 상황에서도 먼저 ‘죄송합니다’를 외치는 습관이다. 언젠가 내가 1도 잘못이 없는 강력한 어깨빵을 당하고도 쿠션 용어(?)처럼 이렇게 말하자, 남편은 ‘네가 뭐가 죄송하냐’며 버럭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슨 반사신경처럼 각종 상황에서 내가 먼저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영어의 ‘Excuse me.’와 같은 것이라고 나름 생각해 왔다. 분쟁을 피하면서도, 양해를 구하는.


그런데 며칠 전, 그날은 아이가 감기에 걸려 상사에게 허락을 받고 30분 먼저 퇴근하는 길이었다. 병원 시간에 맞추느라 급히 택시를 타고 막 출발하려는데, 사무실 전화를 돌려놓아 거래처 직원분과 통화를 하게 되었다. 상대방은 처음부터 목소리가 좋지 않았는데, 내가 한참 전에 보낸 서류를 이제야 정리 중인 모양이었다. 특정 문서가 없다는 볼멘소리에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곤 ‘분명 보내드렸는데...’뿐이었다. 맙소사, 그런데 성급한 일반화까지 시전 되는 것이 아닌가.


맨날 이런 식이야. 정말.


이 일을 시작한 직후, 한 번 서류를 누락하긴 했었다. 하지만 이번 달은 분명 챙겨서 보냈는데. 나는 무척이나 억울했지만, ‘머피의 법칙’이라고 당장 PC를 뒤져서 확인을 할 수 없는 상황인 게 문제였다. 나는 결국 이 상황을 마무리하기 위해서 ‘죄송하다’는 마지막 카드를 꺼내 들었다. 하지만 상대방의 푸념은 이어졌고, 나는 거듭 ‘매우 죄송하다’라고 하고 나서야 전화를 끊을 수 있었다.


문제는 이 날의 일을 회사 동료에게 이야기하다, 내가 봉변 아닌 봉변을 당했다는 사실이다. 딱히 내 편이 되어달라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 이야기의 끝에 ‘힘내요. 은호씨.’ 정도의 토닥임을 받을 줄 알았던 나는 조금 당황했다.


근데, 은호씨도 그건 고쳐야 해. 가끔 보면 너무 선의에 기대는 것 같아.


그녀의 말인즉, 내가 먼저 ‘죄송하다’고 말한 것이 잘못이라는 거였다. 그저 무미건조하게, ‘확인해 보겠습니다.’라고 끊었다면 그렇게까지 감정이 상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내가 왜 먼저 그렇게 말하는지는 알 것 같다고 했다. 내가 먼저 살짝 숙이면, 상대방도 조금은 누구러질 것이라는 기대가 있는 것 같다고. 그 마음을 그녀는 ‘선의’라고 명명했다.


그래,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먼저 양해를 구하면, ‘상대방이 조금은 이해해주지 않을까’란 기대를 품었는지도. 그런데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우리 사회에서 선의의 ‘죄송합니다’를 마치 승패가 있는 싸움에서 백기를 드는 양 취급하게 된 것은.


물론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지켜야 할 선생님이 아이를 해하는,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하고 있는 이야기는 너무 뜬구름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엔 아직도 소외된 이웃을 위해 한 푼 두 푼 모아 몇 년간 기부를 하는 사람과, 꽃다운 나이에 장기기증으로 여러 명의 생명을 살리는 이도 있지 않은가.


평범한 얼굴을 한 내 주위의 누군가가 ‘악의’를 품고 있을지 모르니 더더욱 가시를 세우는 게 맞는 걸까. 아니면 꺼지기 직전의 작은 불씨라도 키워 온기를 가진 마을을 만드는 게 맞는 걸까.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


아, 그리고 이것은 여담인데 앞선 문제의 그날. 나는 아이 병원이고 뭐고 너무나 답답해서 먼저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개인 노트북으로 회사 메일에 접속해 문제의 서류를 제대로 보냈다는 것을 확인한 후, 상대방에게 전화를 걸어 당당하게 보낸 날짜를 밝혔다. 나는 차분하게 아까의 내 상황도 함께 설명했는데, 그러자 그분도 본인이 개인적인 일로 감정적이었다며 사과 아닌 사과를 건넸다. 내가 ‘선의’를 포기하기엔, 아직 세상은 ‘인간다운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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