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아빠가 떠올라 쓰는 글
얼마 전, TV 프로그램을 보다가 돌아가신 아빠 생각이 났다. 알코올 중독에 빠진 아빠로 인해 해체된 가정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술에 취해 멍한 출연자의 눈에서 잠시 아빠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필자의 아버지 또한 거의 30여 년을 매일 같이 술을 드셨고, 그 덕분에 암을 얻었다. 시작이 다소 거칠었지만, 이 글은 아빠를 추억하고 그리워하다 쓰는 글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술에 취하면 폭력적이 된다지만, 아빠는 오히려 반대였다. 나는 어린 시절, 그냥 아빠보다 취한 아빠를 더 반기는 편이었다. 매우 무뚝뚝하여 단둘이 있으면 그 어색함에 숨이 막힐 정도였던 아빠는, 취기가 적당히 올라야만 우리에게 말을 건넬 수 있으신 모양이었다. 술기운을 빌려 아빠는 우리에게 용돈을 주거나, 간식을 사주시기도 했다. 하지만 아빠가 취해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집안에 아빠가 설 자리는 점점 줄어들었다.
이쯤 살아보니, 아빠가 왜 그렇게 술에 의지하게 되셨을지 아주 조금은 알 것도 같다. 평생 다닐 수 있던 직장을 그만두고 시작한 사업이 뜻대로 잘 되지 않고, 아이는 셋이나 낳아 올망졸망 자기만 쳐다보고 있으니 막막도 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대책이 고작 ‘소주 한 잔’이었다니. 그리고 그토록 길고도 깊어졌다니, 너무도 안타깝다. 아빠가 집 밖에서 술잔을 기울이는 사이, 우리는 어른이 되었고 아빠의 부재는 당연해졌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런 일이 있었다. 친정에서 가족 모임을 가진 뒤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우리 가족이 장인어른께 너무한 것 같다며, 남편이 조심스레 자신의 생각을 밝혔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남편의 집은 아직도 가부장적인 분위기가 남아있는 곳이었다. 그런 집안에서 자란 남편에게는 우리 가족이 아버지를 업신여기는 것 같아 보였으리라. 우리는 그저 아버지와 함께 하는 시간이 조금 어색했을 뿐이었는데.
우리 아빠로 말할 것 같으면, 결코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바보’에 가까웠으려나. 그랬으니 친구에게 속아 연대 보증을 서고, 그 빚에 허덕이다 결국은 ‘그놈의 술’따위에 기대지 않으셨을까. 그리고 밖에서는 ‘호인’이라 불리면서, 정작 집에서는 자꾸 방 안에 틀어박히셨다. 아빠가 우리와 조금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나누었다면, 많은 것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빠가 생전에 조금이나마 변하셨다는 것이다. 물론 굉장히 느리고 미약하긴 했지만 말이다. 아빠는 엄마의 성화에 못 이겨 몇 년씩 적자였던 가게를 처분하고, 적은 돈이지만 안정적으로 돈을 버는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일머리가 없고 둔한 아빠는 몸으로 하는 일에 서툴러, 초반에는 병원 신세를 지기도 하는 둥 고전을 면치 못하셨다. 하지만 아빠가 가장의 역할을 조금씩 하기 시작하자, 미약하게나마 우리는 조금씩 가족의 모양새를 갖춰가기 시작했다.
그 후 ‘할아버지’가 된 아빠는 심지어 손녀에게 먼저 손을 내밀기도 하셨다. 아빠가 우리에게 해주었으면 했던 행동들을 손녀에게 하실 때는 조금 뭉클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백발이 성성한 아빠를 모시고 삼대가 함께 하는 가족여행을 떠난 것은, 돌아가시기 딱 1년 전의 일이었다. 무엇인가를 ‘함께한다는 것’이 너무도 생소한 아빠에게는 부족한 것 투성이었던 1박 2일이지만, 처음이었기에 웃을 수 있었다. 그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고.
아직도 조금 힘든 하루 끝에 아빠가 생각나면, 괜스레 보고 싶어진다. 난 아마도 가까웠던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그 사실 자체가 버거운 듯하다. 한 때 미워하기도 했던 아빠지만, 이토록 그가 그리운 것은 아빠가 좋은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빠의 부고에 한달음에 달려온 전 직장 동료분이 들려주시던 이야기 속 아빠는 분명 그랬다. 나중에 다시 만날 아빠가 취기 없는 말간 얼굴로 나를 마중 나오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