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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국문과의 망령

'중지'라고 했을 때, 무엇이 떠오르나요?

by 은호씨

나는 서울 소재 모 대학의 국어국문학과를 나왔다. 내가 국문학을 전공으로 선택했던 것은 순전히 어문 계열의 성적이 좋았고, 수능 국어를 많이 틀리지 않았으며, 책 읽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이런 이유로 전공을 선택하는 것은 정말 바보 같은 일이라는 것을 잘 알게 되었지만, 그 당시엔 ‘그거 공부해서 뭘로 돈 벌어먹고살래?’식의 조언을 하는 집안 어른을 온 마음을 다해 저주했다.


나는 그 걱정아닌 걱정을 ‘내가 하루에 4시간밖에 못 자고 공부하여 일군 노력’을 폄하하는 것이라고 느꼈던 것 같다. 하지만, 학기가 거듭될수록 분노에 찼던 나도 결국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원했던 것은 이런 ‘학문적’인 내용이 아니었고, 이것이 내 앞으로의 삶을 책임질 수 없을 거라고. 결국 나는 여러 복수전공을 기웃대다 이도 저도 아닌 상태로 사회인이 되었다.


어쨌든 내가 지금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런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졸업 후에는 국어와 관련된 그 어떤 일도 하지 않았지만, ‘전공’의 힘은 강력했다. 친구들은 가끔 나에게 자신이 쓴 자소서를 보내 교정을 요청했고, 불의의 사고를 낸 지인의 지인은 죄가 없다고 항변하며 반성문을 써줄 수 없는지 조심스레 묻기도 했다. 결국 나는 문자에 맞춤법이 틀리기라도 하면 급히 삭제 버튼을 누르는 소심쟁이가 되었다.


며칠 전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나의 친정은 달에 한 번 모임을 가진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홀로 계신 엄마의 집에 정해진 날짜에 모두 모이기로 한 것이다. 생전에 아버지가 부지런하셨던(?) 덕분에 우리는 무려 3남매나 되고, 걔 중 둘이나 출가를 해 한 두 명쯤 빠져도 티가 나지 않으니 자유롭게 참석 유무를 결정해도 되는 분위기다. 다만, 만나서 무엇을 하고 무엇을 먹을지는 항상 고민거리였다.


그날도 엄마와 동생들이 함께 있는 단톡방에서 이번 모임에 먹을 메뉴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이었다. 아직 돌쟁이 조카도 있고 해서 구워 먹는 고기를 먹어도 될지, 신경이 쓰였다. 엄마는 계속 핸드폰을 들여다보기 어려우신지 알아서 하라는 투로, 이렇게 말했다.


중지를 모아봐.


나는 순간, 조금 위트 있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서 ‘욕한 거야?ㅎㅎ’라고 받아쳤다. 뭔가 다른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자주 쓰는 말이 아니어서,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몰랐기 때문이다. 최근 문해력 저하 관련 뉴스에서도 굳건히 살아남았던 나는 결국 무너졌다. 엄마는 동생들은 몰라도 너는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니냐며, 또다시 ‘국문과’를 운운했다. 정말, 영원히 고통받는구나.


단톡방은 잠시 소란스러워졌고, 남동생은 ‘중지(衆志)’의 사전적 의미를 퍼오기까지 했다. 엄마가 한 말을 요즘 말로 하면 ‘집단 지성을 발휘해 봐.’ 정도로 풀이할 수 있겠다. 민망함도 잠시, 나는 조금 반가워졌다. 새롭고도 소중한 표현을 하나 더 알게 된 것 같아서.


쓰임이 줄어듦에 따라 일상생활에서 많이 사라지고 있긴 하지만, 난 이런 예스러운 단어들이 좋다. 한 단어만으로도 굉장히 많은 의미를 담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심심(甚深)한 사과’라는 표현으로 ‘매우 깊고 간절하다.’는 의미를 전할 수 있고, 슬픔이 가득한 장례식에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말하며 ‘겸손하고 조심하는 마음으로 정중함’을 드러낼 수 있다. 그러고 보니, 이런 나의 성향이 ‘국문과’에 들어가게 했나.


마지막으로, 누군가가 한자어나 어려운 단어의 뜻을 모르면 알려주자. 이렇게 좋은 표현이 있다고, 너도 하나 가지고 있으라고. 우리는 젠지의 줄임말은 그토록 알아맞히려 하면서 우리말, 좋은 표현을 담아두는 데는 인색한 것 같다. 그리고 모르는 사람은 ‘그런 말 알아서 뭐 해.’라며 철 지난 유행 취급하지 말자. 여기서 이런 예쁜 표현을 줍다니! 조금은 기뻐해도 되지 않을까.


#중지(衆志)를 모으다.

어떤 일을 해결하기 위하여 여러 사람의 지혜를 한 곳으로 모으다.(집중하다.)


#‘삼가’는 한자어는 아니다. 다만, 내가 좋아하는 표현 중 하나이다.

존경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고 정중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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