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멍청한 실수
이 이야기를 하려면, 내 ‘멍청한 실수’에 대해 먼저 이야기를 해야 한다. 나는 서울에서 나고, 서울에서 쭉 자랐다. 나의 본가는 5호선의 두 역 정 가운데여서 어느 역으로 걸어가도 10분 안이면 지하철을 탈 수 있었고, 번화가인 강남이나 잠실로 넘어가는 것도 용이한 편이었다. 그래서인지 대학 시절, 대구나 부산에서 올라온 오빠들에게 인사동이나 명동도 가보지 않은 ‘서울 촌년’이라는 소릴 듣기도 했다. 나는 딱히 거기까지 놀러 가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랬던 내가 남편과 결혼 후 살 곳을 정하던 때였다. 내 직장은 당시 ‘광화문 역’이었는데, 남편이 경기권 아파트로 전셋집을 알아보고 있다길래 나는 ‘지하철 역만 근처에 있으면 돼.’라고 천진난만하게 말했다. 자차로 출근을 할 남편은 뭔가 미안하단 투로 ‘역이 있긴 한데, 1호선이야...’라고 말했는데, 난 그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남편의 말처럼 그 아파트 앞에는 지하철 역이 있긴 했는데, 그래서인지 소음이 심했다. 난 바깥으로 내달리는 1호선을 얼마간 낭만적으로 바라봤지만, 늦은 밤에 선로를 달리는 열차 소리는 참으로 적응이 안 되더라.
또 생전 타봤자 2호선과 5호선, 8호선 정도를 넘나들었던 내 생활권에서 꼭 OO행을 타야만 그곳에 데려다주는 1호선은 괴이하고 신기한 신문물이었다. 게다가 역과 역 사이는 2분을 넣어 계산하면 된다고 늘 배웠는데, 이놈의 1호선은 그 계산이 전혀 들어맞지 않았다. 내리기 한 정거장 전에 일어나 서 있는데 10분을 창밭 구경을 해야 했을 때, 서 있는 나를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만 같아 부끄러웠던 기억도 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독감에 열이 펄펄 나서 2시에 오후 반차를 쓰고 회사를 나왔는데, 주중 낮이라선지 우리 집까지 데려다주는 그놈의 열차가 도무지 오지를 않았던 것이다. 나는 아픈 몸을 이끌고 5시가 넘어서야 간신히 집에 도착했는데, ‘반차’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회의감을 느꼈다. 약 2시간에서 어떨 때는 2시간 반이 걸렸던 그 출퇴근을 멈추게 된 것은 내가 그 회사의 화장실에서 봉지를 벗 삼아 숨을 쉬게 된 후였다.
각설하고, 이 모든 일을 겪은 후에야 왜 사람들이 ‘서울, 서울’하게 되었는지 깨닫게 되었음을, 그리고 그것이 ‘나의 무지’에서 비롯되었음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경기에 산다는 것’이 마냥 싫지만은 않다. 물론, 불편한 것은 많다. 교통, 의료, 그리고 교육은 말해서 무엇한가. 하지만 여기도 사람이 사는 곳이며, 우리네 삶이 존재한다. 어쩌면 약간 뒤처지는 기분은 감수해야 할 부분 정도가 아닐까 싶다.
누군가는 아직 젊은데 왜 안주하냐고, 다그치시기도 한다. ‘더 노력해서 아이를 위해 서울로 들어와야지!’라며. 그런데 무엇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는 사람마다 다르지 않을까?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자기 계발서를 읽으며 앞으로 더 발전해야 한다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마치 ‘바보같이 안주하는 패배자’ 취급을 하는 게 요즘 대세인 것은 알지만 세상 모두가 그럴 필요는 없지 않을까? 이런 사람도, 저런 사람도 있는 게 아니겠는가.
물론, 이런 나의 생각을 누군가는 비웃으며 비아냥거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이 안에서 어떻게든 제대로 살아보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는 중이다. 물에 떠 있는 오리가 평안하게 있는 것 같아 보이는 와중에도 물 안에서는 계속 발을 구르고 있는 것처럼. 나는 그저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소중히 여기고, 그 안에서 작은 행복을 찾으려 오늘도 노력하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