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불면과 마주했을 때
나는 무척이나 잠이 중요한 사람이다. 잠은 나에게 있어 일종의 치료제였다. 예컨대 학창 시절 친구들 사이에서 어려운 일이 있거나, 잊고 싶을 정도의 실수를 한 날이면 더 오래, 더 깊은 잠을 잤다. 그렇게 푹 자고 깨면 내가 느낀 좋지 않은 감정 중 1/10이 날아간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마도 나는 예민한 기질을 ‘잠을 자는 것’으로 조금씩 달래며 자랐으리라.
그랬던 내게 ‘불면’이라는 것이 찾아왔을 때, 얼마나 당황했겠는가. 나에게 잠은 밤에 누워서 양을 좀 셀라치면 금방 빠져드는 매우 당연한 것에 가까웠다. 그런데 몸이 아무리 피곤해도, 마음이 너덜너덜해져도, 해가 뜰 때까지 눈을 감고 있어도 당최 잠이 찾아오지 않자, 나는 신기할 지경이었다. 심지어 밤새 눈을 감고 있었음에도 전혀 잠을 잔 것 같지 않은 느낌은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내가 지독한 불면을 처음 경험한 것은 우울과 불안이 극으로 치달았을 때였다. 나는 당시 겉으로 봤을 때는 회사 생활에 잘 적응한 한 팀의 막내처럼 보였지만, 겉으로만 가면을 썼을 뿐이지 속으로는 곪아가고 있었다. 어느 날, 출근길 횡단보도에 서 지나가는 차를 바라보다 ‘저 차에 치여서 사고가 나면, 회사에 출근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곤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리고 며칠 뒤, 나는 팀장님께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고 말했다. 내가 생각한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하지만 그는 나의 업무 중 몇 가지를 분장해 주고, 다시 생각해 보라며 두 달의 시간을 주었다. 돌이켜보면, 이것은 팀장으로서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에 가까운 조치였지만 당시의 나에게는 큰 좌절감만을 안겨주었다.
본래 마음의 어려움이 있으면, 생각이나 시야가 매우 좁아진다. 나는 내 뜻대로 ‘회사를 나가는 일’조차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내가 겪는 이 어려움은 결코 끝나지 않을 거야!’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때부터였다. 머리에는 걱정만이 가득 찼고, 아무리 자도 개운하지 않았다. 증상이 가장 심한 날은 일요일에서 월요일로 넘어가는 밤이었다. 개그콘서트 엔딩 노래가 들리면 심장이 뛰기 시작했고, 자리에 누워 잠을 청해도 밤을 새하얗게 지새우기 일쑤였다.
어떤 밤에는 너무너무 불안해서 도저히 가만히 누워있을 수도 없더라. 무엇이 그렇게 두려웠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나는 그저 계속 방안을 서성거렸다. 작은 집을 빙 둘러서도 걸어보고, 남편을 가만히 안아도 보고, 그러다가도 죽을 것 같은 공포가 멈추지 않아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깊은 밤 출가한 딸의 전화가 엄마에게 걱정 말고는 남기는 게 없을 걸 잘 알면서도.
그렇게 며칠을 잠을 제대로 못 자다 보면 어떤 날은 녹초가 되어 실신한 양 잠이 들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을 잘 자다 보면 또다시 일요일이 되었다. 불면에 시달리던 나는 어느 날 아침, 회사로 향하는 지하철 안에서 과호흡이 왔다. 한 정거장, 한 정거장 지하철이 회사에 가까워질수록 숨쉬기가 불편해졌다. 결국 나는 팀장님이 말한 그 두 달을 버티지 못했다.
종종 불안과 함께 찾아오는 불면을 만난 지도 어언 10년이다. 나름 불면에 대처하는 나만의 방법도 생겼다. 초기 단계에서는 ‘괜찮아, 네 잘못이 아니야.’ 정도의 혼잣말도 효과가 있다. 좀 더 머릿속이 복잡한 날에는, ‘잠 오게 하는 나만의 영상’을 틀고 잠을 청한다. 이때 가장 중요한 건, 핸드폰을 들고 액정화면을 보지 않는 것이다. 영상을 본다는 건, 그날의 잠은 포기하겠다는 소리나 마찬가지라는 걸 잘 아는 탓이다.
불면이 기척도 없이 찾아온 밤, 오지 않을 잠을 기다리며 창가를 서성이다 보면 사무치게 외로워진다. 그곳이 어디든 머리만 대면 10초면 잠이 드는 남편이 야속했다가, 이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남편이 이 고통을 경험하지 않길 바라니까. ‘불안’과 늘 짝지를 이루어 따라다니는 ‘불면’, 이 놈도 남편마냥 나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나. 불면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좀 더 개발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