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나, 그 사이에서 또 자란다.
우리 집은 칭찬에 인색한 편이었다. 아버지는 원체 말씀 자체가 없으신 분이었고, 엄마는 전형적인 한국 사람으로 겸손과 겸양이 몸에 밴 모양이었다. 내가 어쩌다 100점 맞은 시험지를 들이대도, ‘잘했네~’ 정도가 전부였던 엄마는 언젠가 그런 말도 했었다. 공부는 널 위해서 하는 거라고. 엄마는 왜 내가 항상 칭찬을 바라는 눈을 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시는 것 같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나는 평생 ‘비교’와 함께 자랐다. 나에게는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사촌 언니가 한 명 있었는데, 내가 ‘빠른’으로 태어나는 바람에 학교를 같이 가게 된 것이 화근이었다. 처음에는 잘 버텼으나, 가세가 기운 탓이었을까. 나는 객관적으로 봐도 성격이나 외모 등이 언니에게 꿀린다(?)고 생각했고, 점점 더 다크 앤 새드니스 즉 비관주의자가 되었다.
내 기준에서 딱 한 번, 언니에게 이겼다고 여길만한 일이 있었다. 고등학교 때였다. 내가 다녔던 학교는 시험을 치를 때마다 일정 등수까지를 벽에 붙여주었는데, 내가 그 등수 안에 들어간 적이 있었던 것이다. 평생 가장 잘 본 시험이었고, 친구들이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해 준 탓에 나는 무척 행복했다. 그런데 정작 나의 부모는 ‘은호는 시험 잘 봤어요?’라고 묻는 사촌댁의 전화에 입 한번 옴짝하지 못하시더라.
내가 원한 건 온 동네방네 떠들썩한 자랑질이 아니었다. 그저, 여러 사정으로 항상 기가 죽어있는 엄마가 조금은 행복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엄마를 ‘내가’ 기쁘게 해 드렸다는 뿌듯함. 나는 나로 인해 엄마가 행복하길 바랐다. 어쩌면 엄마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나를 위해 공부를 했구나.
그렇게 시간이 흘러, 엄마가 된 나는 다짐했다. 내 아이에겐 절대 그러지 않겠노라고. 넘치는 칭찬과 사랑으로 키워 ‘엄마를 내가 기쁘게 했다.’는 마음을 많이 느낄 수 있게 하겠다고. 하지만 두둥- ‘유전자’와 ‘보고 자란 것’의 힘은 실로 대단했다.
전혀 계획한 것은 아니었지만, 1월에 태어난 여아인 우리 딸은 뭐든 잘하는 쪽에 속했다. 뭐가 그리 급한지 양말이고 신발이고 자신이 신겠다며 유아 불치병인 ‘내가내가 병’이 참 빨리도 발병해서, 어린이집에서 5살에 유치원에 가도 충분할 아이로 꼽히기도 했다. 놀이터에서 놀고 있으면 남들이 ‘참 발음이 좋네요.’, ‘손이 야무져요.’라며 평가를 하시기도 했다. 그런데, 웬걸. 나에게는 칭찬을 가만히 듣지 못하는 유전자가 제대로 박혔었구나.
아우, 얼마나 부산스러운데요. 성격이 급해서 키우기 힘들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저 ‘예쁘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도로 마무리할 수도 있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어딘가 모르게 부끄러워 칭찬들을 쳐내기 급급했다. 아이가 들을 수도 있는데, 내가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 부득불 걱정이나 흠결을 찾아내, ‘이런 점은 단점이에요.’라는 식으로 그 대화를 마무리했다.
그러던 어느 날,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던 나의 입을 아이가 막으려고 한 일이 있었다. 당시에 나는 버릇없이 군다며 혼을 냈는데, 아이가 울면서 하는 말을 듣고 깨달았다. 내가 그동안 한 말들이 아이에게 상처를 줬다는 것을. 내가 ‘잘난 척하지 않고 겸손의 미덕을 갖춘 사람’이 되려고 내 아이를 힘들게 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사실, 이런 행동이 ‘진짜 겸손’이 아닐지도 모르는데.
아이를 키우는 일은 참 이상하다. 아이가 자라면 자랄수록 나 자신을 계속 돌아보게 하고, 또 반성하게 한다. 그리고 나를 키우던 그 시절의 엄마를 이해하게도 만든다. 엄마가 했던 실수를 내가 고스란히 답습하긴 했지만, 나는 이제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내 아이의 마음을 난 이해할 수 있으니까. 또 한 번 깨닫는다. ‘아이를 어떻게 키울 것인가’라는 문제는 결국 ‘내가 어떤 어른이 될 것인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