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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밥벌이거나 루틴이거나

하늘에서 뚝 돈이 떨어졌으면 좋겠다.

by 은호씨

결혼을 하고 출산까지 하다 보니, 내 친구는 자연스레 두 부류로 나뉘었다. 미혼 친구와 기혼이면서 아이를 키우고 있는 친구. 서로의 관심사가 다르다 보니, 당연하겠지만 엄마가 된 친구들과 자주 연락하게 된다. 그래도 함께 시절을 보낸 친구들은 언제 만나도 편하다. 결혼을 했든 안 했든 말이다. 나는 지난주 정말 오랜만에, 20대에 영화관에서 함께 아르바이트를 했던 친구를 만났다.


미혼인 친구는 부모님을 모시며 살고 있는데, 어찌 보면 한 집안의 가장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다. 그래서일까. 드디어 미루었던 운전에 도전을 한다고 했다. 친구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다 보니 이상하게 남편이 떠오른다. 부담스러울지 모르는 상황을 묵묵하게 버티고 있는 친구가 너무 멋져서 진심 어린 응원을 보냈다. 나라면 분명, 회피하며 숨어버렸을 것이다.


1년 만의 만남이라 무슨 이야기를 꺼내도 처음 듣는 것이라,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야기는 흘러 흘러 종착지로 향했다. 왜 항상 그 끝은 ‘돈’일까. ‘집값이 너무 비싸다, 새 차와 중고차 중 무엇이 낫겠느냐, 대출을 얼마를 받아야 감당이 되려나.’등등 해도 해도 끝이 없다. 마지막엔 늘 한숨이다. 그러던 중 갑자기 친구가 툭 한마디를 던졌다.


이 근처에 로또 명당이 있다던데!


바로 근거리에 로또 1등을 여러 명 배출한 오래된 복권방이 있단다. 우리는 헤어지기 전, 그곳에 들러 친구는 로또를 사고 나는 연금복권을 샀다. 나는 한방에 오는 큰돈보다, 조금씩이라도 정기적으로 받는 돈을 선호하는 편이다. 그러면 일을 하지 않고도 월급을 받는 기분일 것 같다. 상상만 해도 이렇게나 좋다니!


친구가 물었다. 만약 로또에 당첨이 된다면, 회사를 그만두겠느냐고. 나는 그만두지 않겠다고 답했다. 나는 복권에 당첨되는 일 자체가 완벽한 행복이 되려면 그 돈을 어떻게 쓰는지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결정에는 안정을 추구하는 내 성향도 한몫했을 것이다. 난 일상에 큰 변화를 주지 않았는데도, 매달 꽁돈이 들어오면 그게 더 큰 기쁨일 것 같았다.


친구는 ‘퇴사’를 선택하겠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로또에 당첨이 되어도 회사를 다니겠다고 하는데, 그것은 ‘루틴’ 때문이란다. 일어나서 회사에 가고, 일을 하는 것이 몸에 배어 멈추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다. 다람쥐가 쳇바퀴 안에 들어가 계속 달리는 것처럼. ‘회사에 가서 일을 하는 것’을 대체할 자신만의 새로운 루틴이 있다면 ‘퇴사’라는 결정은 당연하다고 강변했다.


최근 영화 「인턴」을 다시 볼 일이 있었다. 배우 로버트 드 니로가 연기한 주인공 ‘벤’은 은퇴 후 그동안 모은 마일리지로 세계 여행을 다니기도 했지만, 집에 와서는 더 큰 공허함을 느낀다. 그래서 그는 그냥 ‘움직이기’를 선택한다.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무작정 밖으로 나가기로 한 것이다. 그는 한창 일하는 사람들 사이에 끼어 모닝커피를 마시기도 했다. 로또에 당첨되어 자발적 퇴사를 감행한다면, 그처럼 자신만의 루틴을 만들면 되려나?


내가 ‘나만의 루틴’을 만든다면 오전 시간엔 살기 위한 운동을 하겠다. 그리고 낮에는 글도 쓰고, 하고 싶었던 공부도 하고 싶다. 청소나 요리와 같은 집안일도 좀 더 즐겁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여유를 즐겨도 정해진 날엔 일정한 금액이 통장에 찍힐 것이다. 생각만으로도 너무 행복하다. 그런데 결국 ‘벤’도 앤 해서웨이의 회사에 입사했으니, 최고의 루틴은 ‘입사’려나?


사실 일하는 이유가 꼭 ‘루틴’이나 ‘돈’ 때문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일을 하는 것’이 ‘자기 효능감’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무슨 일이든 하고, 일정한 돈을 받는 행위는 자신이 그만큼의 가치를 가지는 인물이라는 방증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누군가 천을 버는 사람이 이백을 버는 사람보다 더 가치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니 조금은 모순적이긴 하겠다.


이런저런 생각들은 당첨번호가 단 1도 맞지 않으며 산산조각 깨어졌지만, 잠시나마 행복했다. 새삼 ‘먹고살고자 해야 하는 일‘과 루틴으로서 ‘일을 하는 것’은 천지 차이라는 걸 느꼈다. 그런데,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일이란 게 어딘가에 있기는 할까. 불혹에도 진로 고민을 하고 있다니, 나는 참으로 아직도 철부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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