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42 엎어라, 뒤집어라. 장점! 단점!

세상의 모든 일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

by 은호씨

점점 그 기간이 짧아지고 있지만, 봄가을의 해 질 녘 무렵 날씨는 참 좋다. 그래서 이 시기의 동네 놀이터는 ‘만남의 장’이 된다. 아이들은 신나게 놀고, 엄마들은 수다로 꽃을 피운다. 주제는 그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 누군가 하나의 화두를 던지면, 이야기는 꼬리의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물론 가장 인기 있는 주제는 단연 ‘남의 편’에 관한 것이다.


한 아이의 엄마는 남편이 결혼 전에 친구도 많지 않고 조용해서 좋았다고 했다. 그런데 결혼하니 웬걸, 집에만 붙어있고 주말에는 무조건 가족이 함께 있어야 해서 자신에게 자유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고 푸념했다. 우리는 칭찬인지 험담인지 모를 이야기에 잠시 갸웃했다가, ‘가정적인 남편’이라는 포장지를 골라 마무리했다.


연하인 남편과 사는 엄마는, 연애할 때 그가 자신의 말이라면 뭐든지 하는 게 편했다고 했다. 그런데 이제는 자신이 말하지 않으면 그 무엇도 제대로 하지 않는다고 하소연했다. 집안의 대소사나 전반적인 가계 경제까지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것이 어떨 때는 부담스럽다고 했다. 나는 그래도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남편 덕에 ‘당근’을 자주 할 수 있는 그녀가 부럽다고 포장했다.


우리에게는 암묵적인 룰이 있다. 내 남편의 험담은 ‘나’만 할 수 있고, 결국은 그것이 진짜 ‘험담’이 아니기 때문에 듣고 흘려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들이 놀이터에서 하는 이야기들은 일종의 등산할 때의 ‘야호’ 같은 것이다. 완등 후에 정상에서 소리치듯, 치열한 육아 끝에 그냥 시원하게 뒷담화 한번 하는 거다. 이거라도 못하면 죽으란 소리지.


그런데 듣다 보니, 모든 이야기를 관통하는 공통점이 보였다. 각자의 사정과 일화들은 다를 테지만, 보통은 연애 때의 장점이 결혼 후의 단점이 되곤 한다는 것이다. 내 친구는 남편의 ‘경제관념’이 맘에 들어 결혼했는데, 아이를 낳고 나서는 조금 부딪혔다. 지출하는 항목에 대한 중요도가 서로 다른 듯 보였다. 친구는 힘들어했지만 덕분에 서울 학군지에 살고 있으니, 이는 장점에 가까울 것이다.


내 경우엔 ‘책임감’이 문제였다. 장남에다 어린 나이에 독립적인 생활을 했던 내 남편은 무척 책임감이 강해 보였고, 나는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결혼하고 보니 ‘책임감’이 ‘똥고집’으로 바뀌더라. 남편은 혼자 생활한 시간이 길었던 만큼 자신이 정한 계획이나 선이 명확해 보였고, 그 어떤 설득이나 양보가 통하지 않아 나는 몇 번이나 벽을 보고 이야기하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심지어 남편은 누가 봐도 명백한 문제에서도 고집을 부렸다. ‘미안하다’는 말을,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울어도 보고 윽박도 질러봤지만 그는 그럴수록 입을 닫아버렸다. 나는 그에게서 간신히 들은 ‘인정할게’를 ‘미안하다’는 말로 듣는 ‘초’능력을 발휘하여 결혼 생활을 유지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남편의 고집이 ‘자존심’이 아닐까 생각하곤 조금 안쓰러웠음을 고백한다.


그러고 보면, 세상의 모든 일은 생각하기 나름인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정신 승리’, ‘자기 합리화’라는 말로 스스로를 위로하는 게 아닐까. 그런데 요즘은 이런 행위를 너무 비웃고 폄하하는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살아가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하고 있다는 증거일 수도 있는데. 그리고 이게 얼마나 어렵다고! 나는 남편을 이해하기까지 십 수년이 걸렸다고!


모일 일이 없어서 그렇지, 우리의 남편네들도 한 자리 가진다면 아내들에 대한 불만이 쏟아질 것이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으니, 우리 또한 그들에게는 오점투성이겠지. 다만,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중 하나는 분명 장점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걸. 혹시라도 푸념으로 그치지 않고 계속 불만스럽다면, 손바닥 뒤집듯 한 번쯤 생각을 바꿔보길 바란다. 나처럼 소개팅 날, 처음 마주했던 볼 빨간 남정네가 보일지도 모르니까.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41 관계 맺기에 빠진 엄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