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로망인가, 집착인가
나에게는 이상한 로망이 하나 있었다. 주변에 그런 가족을 하나 알고 있어서기도 했지만, 아이를 낳으면 가족끼리 모여 즐겁게 보드게임을 하고 싶었다. 자라면서 내가 그런 경험이 적었기에, 가족이 다 같이 모여 즐거운 활동을 하는 것이 부러웠던 것 같다. 제대로 편을 짜서 하기엔 4인 가족이 딱 좋아 보여서 심각하게 둘째를 고민했을 정도였다.
이런 저런 사정으로 추가 출산은 포기했지만, 나는 로망을 시도해 보기로 했다. 아이가 유치원에 들어가고 얼마쯤 지났을까. 엄마가 느끼기에도 유아에서 어린이로 넘어가는 것 같기에, 학습적인 보드게임을 하나씩 수집하기 시작했다. 아이는 처음에는 그 자체가 신기한지 조금씩 관심을 보였고, 몇 번은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욕심이 생긴 나는 일반적인 보드 게임도 시도했는데, 세상의 모든 일은 이상과 현실이 다르다는 걸 슬슬 깨닫게 되었다. 일단, 아이와 어른이 대결을 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었다. 나는 게임 진행 상황을 보다 눈치껏 살짝 져 주기도 했지만, 아빠는 게임을 이기면서도 얄밉게 굴어 결국은 아이를 울려야 직성이 풀리는 것 같았다.
재밌게 하고자 시작했던 게임이 울음바다가 되니, 나로서도 난감했다. 그렇다고 아이를 울리지 않기 위해 계속 져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안 그래도 외동이라, 배려나 양보 등을 배울 기회가 적은 아이에게 ‘게임은 질 수도 있다.’, ‘즐겁게 함께 노는 시간이 중요하다.’를 가르쳐야 했다.
한두 번 울면서 흐지부지 게임 시간이 마무리되자, 아이는 게임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다. 하지만 그 시간은 좋은지, 엄마랑 아빠가 대결을 하고 본인은 ‘심판’이나 ‘은행’을 하겠다고 우겼다. 우리는 ‘그러면 하지 않겠다.’며 아이를 몰아붙였는데, 아무래도 아직 게임 실력도 마음 근육도 모두 부족한 아이에게는 독이 된 것 같았다.
그럼에도 나에게는 이상한 집착이 있어서, 이놈의 ‘로망’을 완벽하게 포기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계속 아이가 좋아할 만한 다른 게임(!)을 시도했다. 점차 나이가 들면 나아질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아이는 점점 더 지기 싫어했고, 게임은 힘겨루기가 되었다. 고민 아닌 고민을 다른 엄마에게 토로했더니, 대뜸 유치원 생활은 어떤지 묻더라.
무슨 게임을 하는지, 게임 상황에서 부모의 대처가 어떠한지를 물을 줄 알았던 나는 조금 당황했다. 요 근래에는 딱히 유치원에서 연락을 받은 적도 없고, 학부모 상담 때도 특별한 이야기가 없었기에 나는 잠시 고민했다. 집에서 딱히 변화한 게 없다면, 아이가 주로 생활하는 환경에서 어떤 변화가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조언이었다.
그러고 보니, 퍼뜩 떠오르는 일이 있었다. 우리 아이는 1월에 태어난 여아라, 유아기까지는 키도 크고 발육도 빠른 편이었다. 아빠에게 튼튼한 통뼈를 물려받아 힘도 세고,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미가 발휘되어 대/소근육의 발달도 빨랐다. 그래서일까. 5세 때 단오 행사로 한, 손가락 씨름 대회에서 떡 하니 천하장사가 되기도 했다.(부상은 천하장사 소시지 한 박스였다.)
그러나 정확히 1년 뒤의 단옷날, 아이는 울면서 고배를 마셔야 했다. 그해에는 돼지 씨름이었는데, 토너먼트로 이어진 최종판에서 졌단다. 사진을 보니, 상대방 친구는 아이보다 한 뼘이나 더 크더라. 6세가 되면서 다른 친구들이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게, 내 눈에도 보였다. 분명 우리 아이도 자라고 있었지만, 그 속도가 예전만 못하다고나 할까.
우리 아이는 어린이집에 다닐 때는 언니처럼 친구들을 챙기는 일에서 즐거움을 얻는 아이였다. 그러면 자연스레 칭찬도 따라왔을 것이다.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아도 친구들 사이에서 우위를 점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차이는 점점 줄어들었고, 최근 부쩍 친구들과의 대결에서 밀리는 것 같았다. 아마도 ‘내가 최고는 아니다.’라는 세상의 이치를 깨닫는 순간을 맞이했으리라.
한 번씩 쑥 자란 다른 아이들을 보면 나조차도 걱정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데, 아이는 오죽했을까. 유치원에서도 소소한 좌절을 겪는 아이가 집에서까지 그런 일이 이어지자, 저항이 심했다는 게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이 또한 지나가는 과정이란 것도 알겠다. 그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묵묵히 아이가 겪는 시간을 지켜보고, 아이가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기다리는 것이란 걸. 물론 종종 집에서 보드게임은 하면서.(나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