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싸움에 터진 새우등
이 글을 쓰기까지는 다른 글보다 조금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나는 내 주변의 일을 쓰기로 했기에, 사실 이 이야기는 진즉에 썼어야 맞았다. 하지만 자신이 없었다. 중심을 딱 잡고,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글을 쓸 자신이. 노파심에 미리 밝혀두지만, 이 글은 ‘정치’에 관한 글이 아니라 ‘가족’에 관한 글이다.
지난 대선과 올해 대선, 그 득표율로 우리는 나라가 반쪽이 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사람일지라도 성향이 다를 수 있으니, 편하게 무슨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망설여졌다. 이런 상황에 4인 가족인 우리 집 안에 정치 성향이 완전 다른 사람들이 있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에 가까웠다. 가족 간의 정치 갈등이라니. 이 이야기는 우리 가족에게만 국한된 일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으로 시작해 본다.
돌아가신 아빠가 설이나 추석과 같은 명절에 작은 아빠와 피 튀기는 설전을 벌인 적은 있었어도, 원가족 내에서 정치적인 갈등이 일어날 일은 거의 없었다. 아예 그런 ‘주제’의 이야기를 꺼내질 않았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나 또한 뚜렷한 정치적 노선 없이 성인이 된 후, 스스로 노선(?)을 정할 수 있었다.
동생들이 모두 성인이 된 이후에도, 서로 짝을 찾아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동안 우리는 각자의 삶을 살아내느라 ‘정치의 政’ 자를 언급할 여력이 없었다. 심지어 엄마도 당신 몫의 삶을 버텨내시며 힘들다는 푸념을 할지언정, 그게 ‘前 대통령 때문이다’라는 망측한 평가를 난 이제껏 들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날(!) 이후부터였다. 남동생은 ‘그’를 수호하던 여성 변호사처럼 계몽된 듯 보였고(조금 다른 측면으로), 사람들이 사느라 바빠서 관심을 덜 가진 탓에 누군가는 우리를 속이고 나라를 어지럽힌다고 주장했다. 주말엔 집회에 참가하기 시작했고, 동생의 시계는 그에 대한 탄핵이 결정되어야 흘러갈 것만 같아 보였다.
엄마는 분명 국회에 무장을 한 군인들이 들이닥친 것을 보았음에도 그 모든 것이 누군가의 탓이라 말했다. 그 어떤 이야기를 시작해도 임기를 마친 ‘누군가’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처음에 꽤 당황했는데, 이 견고한 의식의 흐름이 어떻게 이어지는 것인지 이해하기 위해 정말 최선을 다했다.
가장 지근거리에 살고 있는 모자의 사이가 끝도 없이 멀어지자, 중재의 임무는 맏이인 나에게 하달되었다. 하지만 나는 30대 중반인 남동생의 정치적 자유를 억압할 수 있는 것인지, 그것부터가 의문이었다. 내가 미적대는 동안 난데없이 불통은 마구 나에게 튀었다. 엄마는 내가 남동생을 부추겼다고 여겼고, 나는 억울해서 눈물이 다 쏟아졌다.
당황한 엄마는 그 주에 회사 근처로 와서 함께 점심을 먹으면서 내 눈치를 살폈고, 남동생에 대한 이야기나 정치 이야기는 한마디 하지 않고 멋쩍게 헤어지며 이 사태를 대충 봉합했다. 그렇게 우리는 매달 만나는 모임에서도 정치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게 되었다. 누가 그렇게 하자고 ‘꽝꽝’ 정한 건 아니었지만.
이 사건(?)이 이어지는 동안, 내가 가장 많이 한 생각은 ‘이게 싸울 일인가!’라는 것이었다. 남동생은 자꾸 엄마를 설득하고자 했고, 엄마는 열려있다고 말을 하면서도 한 마디도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았다. 나는 남동생에게 엄마를 그저 ‘노모’로만 보라고 말을 했고, 남동생은 남도 아닌 우리 가족이기에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는 것을 두고 볼 수만은 없다며 동동거렸다.
나는 나대로 두 사람의 심경이 모두 이해가 되어 답답했다. 내가 깨달을 바에 따르면 두 사람의 주장, 저 밑바닥에는 공통적인 것이 있었다. ‘나라에 대한 근심’, ‘미래 세대에 대한 걱정’, ‘내가 아는 것을 모르는 사람에 대한 연민’이 바로 그것이었다. 서로가 걱정되고, 서로를 사랑해서 챙겨주고자 하는 마음이 그 시작인 것 같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것이 비단 ‘정치문제만이 아니’란 결론에 도달했다. 두 모자의 의사소통이 항상 일방적이거나 단편적이어서 같은 상황을 나에게 전달해도 서로 다르게 이해하고 있는 때가 많다는 걸 알게 되었던 것이다. 단언컨대 우리 집안은 다정하거나, 대화가 많은 집안이 아니어서 이 사달이 난 것 같았다.
아이를 낳아 키우며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국민으로서, ‘정치’는 삶과 굉장히 깊숙이 연결되어 있으니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모든 것에 앞서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관계는 ‘가족’이다. 이번 일을 겪으며 내가 엄마에게 조금 실망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려운 시절 가정을 지키며 아이 셋을 키운 ‘우리 엄마’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란 걸 안다.
마지막으로 나는 엄마에게 다소 뼈아픈 충고도 하나 남겼다. 그 시절, 마흔에 가까운 나이에 본 늦둥이 아들이 너무도 걱정되겠지만 이제는 놓아주라고. 혼자 자신 몫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동생을 그저 응원해 주라고. 내가 보낸 장문의 카톡을 읽고 엄마는 많이 울었다고 했다. 그 눈물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는 이제 앞으로 또 계속 알아갈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