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집에서 살고 싶은 마음은 어디로 가야 하나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이런 내용을 써도 될지 잘 모르겠다. 최근 무덥던 어느 금요일, 부동산 대책이라며 어떤 속보가 떴을 때 우리 부부는 말 그대로 우왕좌왕했다. 둘 다 회사에서 튀어(!) 나와 부동산에 도착했으나 그래도 억 소리가 나는 집인데,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살 수 없었던 우리는 결국은 또다시 포기와 좌절을 경험했다. 이 글은 내 마음을 가라앉히고자 쓰는 글이다.
내가 남편과 결혼을 하겠다고 했을 때, 우리 엄마는 단 하나의 이유로 ‘반대’를 외쳤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어머니 아버님이 살고 계신 집이 ‘오빠 명의’로 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엄마는 서글서글한 남편을 만나고도 그것이 걸린다며 한사코 나에게 ‘다시 생각해 봐라.’고 거듭 조언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콩깍지가 씌었다기보다는, 세상 물정을 몰랐던 결혼 적령기의 나는 엄마를 이렇게 공략했다. 논리는 나름의 설득력이 있었다. ‘나는 오빠와 어차피 결혼을 할 건데, 엄마가 계속 그렇게 오빠를 나쁘게만 본다면 엄마 속이 말이 아닐 거 아니냐. -> 나는 엄마가 속상한 것도 싫으니, 엄마가 마음을 바꿔 먹어달라.’ 참 얼마나 거창하게 포장된 말도 안 되는 논리인가!
어렵사리 결혼을 한 나는, 이전에도 썼듯이 한 푼 두 푼 종잣돈을 모아 어떻게 아파트 전세까지는 입성했으나 그러고 나니 아이의 입학이 코앞에 와 있었다. 계속 전세살이를 해도 괜찮다고. 어머니 아버님이 어려운 시절,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열 번 백번을 생각하고 한 결혼이었건만. 내 집에서 살고 싶은 마음 앞에선, 속절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남편에게 이 상황을 타개할 묘책을 찾아보자고 슬쩍 말을 해보기도 했지만, 그를 비난하는 것처럼 들릴까 조심스러웠다. 잘나지도 않은 며느리가 자식 둘을 키워낸 어머님, 아버지의 세월에 훈수를 둘 수 없다고 생각했달까. 이런 생각에는 이 상황을 늘 죄스럽게 여기는 어머니도 한몫 거들었다. 그 누구보다 힘들게 사셨던 우리 어머니는 항상 내게 미안해하셨고, 나는 ‘그걸로 됐다.’고 위안하기도 했던 것 같다.
사실 지나가는 사람 누구를 붙잡고 물어본들,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이나 대답은 한결같을 것이다. 누군가는 조용히 입 다물고 있는 내가 ‘답답하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 집안이나 고민이 없는 집이 없듯, 시댁에도 그만한 사정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한편으로는 ‘자식에게 누를 끼치고 싶은 부모가 그 어디 있을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 입학을 앞두고 꼭 보내고 싶은 학교 근처에 있는 한 아파트를 사고자 매주 그 동네를 배회하던 우리에게 떨어진 청천벽력 같은 규제에 나는 한동안 마음이 복잡했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서 ‘우리의 능력으로(!) 우리 이름으로 된 집을 사서 살고 싶다.’는 소박한 욕심이 뭉게뭉게 피어올라 마음이 쓰렸다.
그렇게 자꾸 나쁜 마음이 들더니, 결국은 그 화살은 나에게로 와서 닿았다. 하다못해 주식이나 다른 투자를 할 엄두도 못 내는 내 종지 같은 그릇도 미웠던 것이다. 이 미래를 예견한 엄마의 선견지명에 혀를 내두르면서도, 뭔가 엄마에게는 들키고 싶지 않아 모든 감정을 숨기고 안부 전화를 걸었다. 매일 저녁 한숨을 푹푹 쉬는 남편이 야속하면서도 안쓰러워 눈물을 참았다.
어찌 나랏일이 모든 사람의 사정을 다 아우를 수 있겠는가. 그걸 알면서도 적당히 빚을 내어 우리 힘으로 갚아나가며 살아보고자 했던 그 용기를 낼 기회조차 없어진 지금이 안타깝다. 그냥 정직하게 땀 흘린 만큼 벌고, 성실하게 살아가고 싶었던 우리는 이 사회에서 또 ‘바보’가 되어 버린 걸까.
모든 희망이 사그라들었던 어느 여름밤, 우리 부부는 저녁 산책길에 동네에서 저렴하면서도 맛있는 삼겹살 집을 찾았다. 그곳에서 남편이 구워준 대패 삼겹살에 밥 한 그릇을 뚝딱하는 딸아이를 보며, 나는 그냥 ‘허허실실’ 웃어버리고 말았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나와 딸내미가 먹을 고기를 먼저 구워주는 남편을 보면서 엄마에게 할 말을 떠올린다.
엄마, 그래도 난 결혼을 잘못한 것 같진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