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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시드는 것은 꽃만이 아니야

폭염을 대비하지 못한 자의 최후

by 은호씨
사람이 시든다.

「폭삭 속았수다」에서 박보검 배우가 연기한 양관식은 아침에 눈을 뜨면 바로 일을 하러 가야 하는 일개미였다. 부지런함이 몸에 밴 그가 어쩔 수 없이 일을 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는 마치 모든 것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아내 오애순이 무심히 읊었던 이 대사는 퍽 슬펐다.


사는 게 숨이 차요.

배우 최우식을 모두에게 각인시킨 영화 「거인」 포스터에 적힌 문장이다. 보호시설에 살고 있는 ‘영재’가 어떻게든 그 안에서 살아남으려 발버둥을 치는 모습을 참으로 잘 표현한 문장이 아닐 수 없다. 위의 두 대사 모두, 요즘 내가 참 많이 생각하는 것이다.


왜 이렇게 사는 게 벅찰까.


주 5일을 출퇴근하는 일을 하면서 근 1년 반의 기간 동안 나는 온전한 쉼을 가진 적이 없었다. 주말엔 가족 행사, 아이 문화센터를 종종거리며 다녔고 아주 정말 간혹 아이친구 엄마를 만나기는 했어도, 뭔가 시원하게 해소가 되지 않았다. 나에게는 오롯이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내향인인 나는, 아무도 없는 집에서 홀로 있는 시간을 가지지 못하게 되자 시들어갔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왜 이렇게 나약한지 스스로를 자책하게 되었다. 40대에 들어서며, 친구들의 면면을 살펴봐도 누구 하나 걱정거리 없는 친구들이 없었다. 부모가 아프시거나, 영끌을 한 대출금 이자가 목을 조여오거나, 회사에서 자리가 위태위태하거나. 그 모양이 다를 뿐, 고민이 없는 집이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있었다.


누구나 내 아픔과 내 고민이 제일 크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다 힘들다는 걸 잘 알지만, 내가 느끼는 고통과 힘듦이 제일 크다. 그런데 모두가 그만한 고민이 있다는 걸 알기에, 어디에 하소연하기도 쉽지 않다. 이제는 우리가 가진 고민들의 덩이와 무게가 커서, 누군가와 쉽게 나누기 어려운 것이다. 결국은 내 얼굴에 침 뱉기이고, 나눈다고 달라질 것도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려나.


최근 정말 오랜만에 고등학교 친구들과 브런치 모임을 했다. 거진 1년 만의 개인적인 주말 외출이었을 것이다.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디저트에 커피까지 장장 6시간을 수다를 떨었건만, 집에 오니 녹초가 되어 울상이었던 모양이다. 이런 내 모습에 남편은 불만을 토로했다. 내가 조금은 기분이 좋아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주말 독박육아를 했는데, 되려 내가 더 힘들어 보이니. 원 참.


언제부턴가, 나는 내가 ‘쳇바퀴 속 다람쥐 같다.’고 생각했다. 깨어있을 때는 계속 무언가를 해야 하고, 멈출 수 없는 상태. 중년이 힘들다는 게, 바로 이런 걸까. 나는 지쳤다는 사실을 인지할 새도 없이 그저 늘 그랬던 것처럼, 다시 일어나서 출근을 하고 일을 하고 돌아와서 저녁을 먹고 빨래를 널었다. 이놈의 폭염이 들이닥칠 때까지.


정말이지, 더위를 잘 타지 않던 나까지도 숨이 턱턱 막히는 요즘. 잘 돌아가던 머리도 멈춘 듯 멍하다. 갑자기 먹고 싶다며 이 와중에 부침개를 부쳐 몇 장을 먹었는데, 자기 전 갑자기 분수토를 했다. 이런 구토는 아이들이나 하는 게 아니었나? 그다음 날 아침에는 설사를 다 했다. 더위를 먹은 모양이다.


계약기간을 반년 정도 남기고, 대표님은 내년에 어떤 계획이 있는지 넌지시 물었다. ‘아이 초등 1학년을 일을 하며 해낼 수 있을까?’ 안 그래도 요즘 나에게 계속 물어보고 있는 질문이었다. 5인 미만의 작은 사업장, 퇴사도 인수인계도 사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결단을 내려야 하는 시기라면, 그게 여름은 아닐 것이다. 좀 더 찬 바람이 슝슝 부는 날에는 현명한 결정을 내릴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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