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향인의 간절한 염원
지금은 누구에게나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집순이’지만, 나라고 언제나 집이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온 가족 다섯 식구가 반지하 단칸방에 살던 시절, 엄마는 항상 나를 제일 먼저 깨워야 했다. 안방에 들어선 냉장고, 바로 그 앞이 내 자리였기 때문이었다. 냉기 때문에 난 늘 코가 시렸다. 아빠는 걸핏하면 집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왜 그러셨는지 이해가 안 되는 바는 아니다.
얼마 후, 엄마는 친인척에게 돈을 빌려 방을 하나 늘렸지만 반지하를 벗어나는 데에는 무려 10년의 시간이 걸렸다. 화장실에 돌아다니는 바퀴벌레를 바가지에 가두고, 여름철 홍수에 잠기지 않기 위해 하수 구멍에 들어찬 쓰레기를 퍼 올리고, 동파 방지를 위해 수전에 내복을 둥둥 두르면 한 해가 지나가 있었다.
그 다세대 주택 2층엔 주인집이 살고 있었고, 엄마는 한 번씩 나에게 작은 봉투를 들려 올려 보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집의 월세는 10만 원이었고 10년간 단 한 번도 오르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엄마는 아빠가 아니라, 이런 소소한 응원으로 그 시절을 버텼던 것 같다. 우리는 벌거벗은 변태 놈이 나와 여동생이 있는 작은 방을 훔쳐본 뒤에야 그 집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 집의 옆옆 골목에 새로 생긴 신축 빌라에 입주하게 된 건, 내가 대학생 무렵이었다. 엄마는 어느 날, 덜컥 집을 샀다고 했다. 다시 얼마의 빚이 생긴 것 같았으나, 나는 마냥 좋았다. 엄마와 나는 입주 전에 그 집을 몇 번이나 닦았다. 작은 평수였지만 방이 3개에 화장실은 무려 2개였다. 게다가 3층이었다. 엄마는 더 이상 비가 많이 오는 날이 두렵지 않다고 했다.
그때부터였다. 혼자 있는 집이 좋아진 것은. 엄마가 일하느라 집을 비워도 더 이상 싫지 않았다. 여동생이 있어 방을 혼자 못 쓰는 것은 천추의 한이었지만, 그래도 나를 위한 공간이 생겼다는 게 중요했다. 특별히 뭘 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혼자서 사부작사부작 나는 시간을 잘도 보냈다. 읽고 싶었던 책을 밤새서 읽었고, 일기를 쓰고, 편하게 잠을 잤다.
그때의 나에겐 그런 시간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성인이 되어 마주한 사회는 냉정하다 못해 차가웠다. 열등감과 자격지심으로 가득 찬 20대 여자 애에겐 결코 그 어떤 것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대학 졸업도, 취업도, 연애도. 보고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술도 참 많이 마셨는데, 스물다섯이 되었을 때 반 오십이라며 ‘내 인생은 망했다.’고 생각했던 건 지금도 참 많이 기가 차다.
취직을 하고, 본격적으로 돈을 벌기 시작하며 점차 깨닫게 되었다. 나에게는 집에 있는 시간이 참 중요하다는 걸. 부끄러운 일이지만 나는 최장 3년 이상 같은 회사를 다니지 못했다. 2년 정도가 지나면 ‘번아웃’이 아주 심하게 왔고, ‘그만두어야 살 수 있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완전히 일에서 해방되어 집에서 어느 정도 충전을 한 뒤에야, 다시 일을 할 에너지가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이는 지금도 진행형이다. 나는 육아와 일을 병행하는 사람들을 존경하다 못해 경이롭게 쳐다보게 된다. 나에게는 절대 할 수 없는 영역인 것만 같다. 출퇴근하는 일을 시작한 지 어언 2년, 난 온전히 혼자 집에 있는 시간이 부족해 에너지가 고갈되어 가고 있다. 남편은 이런 나를 위해 주말에 한두 시간씩 아이와 외출을 해 주지만, 그걸론 턱없이 부족하다고 느낀다.
최근 친구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주 3일 출근이라, 격일로 혼자 집에 있는 시간도 확보되면서 사람에 대한 스트레스도 적은 일. 그런 일을 하고 싶다고.
약속해, 그런 일 알게 되면 나도 꼭 알려주기로.
일하다 친구 덕분에 한참 웃었다. 혼자 있는 집에서 에너지를 얻을 수 없는 요즘, 잠깐의 에너지 충전이 되었던 순간이었다. 나의 ‘호’ 중에서도 ‘극호’인 혼자 있는 집에서 풀충전하는 그날을 간절히 염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