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음을 향해 걷는다(산토도밍고to빌람비스티아 29.3km + 점핑)
1. 여유 있는 아침
아침 출발을 위해 준비를 하는데 이런 비가 제법 온다. 8시부터 10시까지 피크로 비가 많이 내릴 예정이고, 오후에도 간간이 가는 비가 뿌려질 듯하다. (준)공립 알베르게는 8시 혹은 8시30분 퇴실원칙. 청소 담당자가 8시부터 청소를 시작해 숙소에 더 머물기도 어렵다.
스페인 순례객 2명(도보 1인, 자전거 1인)은 일찌감치 준비를 마치고 8시에 비를 뚫고 각자의 여정을 시작한다. 어제 새로 결성된 까미노그룹은 저녁식사를 했던 바로 자리를 옮겨 커피 한잔 하며 시간을 보내기로. 다행히 순례자 식당을 자처하는 이 레스토랑은 오전 6시 반부터 영업을 한다.
통상 순례 스탬프는 숙소나 성당 정도에서만 찍는 것으로 알았는데, 이 식당에도 전용 스탬프도 있다. 저렴한 커피 한 잔(1.2 유로)에 비 피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스탬프 수집도 하나 더 한다. 먹성 좋은 한국인 청년 둘은 어제 못 먹은 스테이크를 주문해 아침부터 맛있게 먹는다.
간만에 여유 있는 아침. 페북 포스팅도 다시 한 번 보고 댓글 달아준 페친들에게 감사도 표시한다. 식구들에게 카톡도 보내고, 간만에 메일을 확인하고 필요한 메일도 몇군데 보낸다. 석달 한국을 비웠더니 업무 연락은 이제 거의 없지만 그래도 때되면 처리를 기다리는 일들이 계속 쌓인다.
2. 빗 속을 걷다
커피도 다 마시고, 아침 수다도 다 나눴고. 슬슬 움직일 참이다. 알렉스, 지나, 나쵸가 9시 경 길을 나선다. 한 시간 전보다는 빗줄기가 잦아들기는 했지만 아직은 아닌 듯한데 매일 움직이던 버릇이 있으니 그냥 걷겠단다.
나는 메일 두 개와 메신저 교신 한 두 개 더 마무리하고 9시 반에 길을 나섰다. 어제랑 비슷한 22.7km. 어제 같은 속도로 걷는다면 오늘도 2시 대에는 목적지에 도달하겠지 싶다.
그런데 비가 잦아들 기미가 없다. 이런. 방수 바람막이로 안 되는 수준이다. 오늘은 대체로 국도 옆 비포장 순례길을 걷는 길. 저 멀리 순례길과 도로가 교차하면서 비 피할 고가가 보인다. 속도를 높여 고가로 뛰어들어가 우비를 꺼내 입는다. 다행이라면 오늘 걷는 길에는 지나는 마을이 여럿이다. 대략 4~5km에 하나씩. 비 피할 성당이든 까페든 광장 안 처마를 최대한 활용하리라 다짐한다.
다행히 두 번 째 마을 도착할 즈음에 비가 그친다. 바람이 차 방한용으로 우비는 계속 입기로. 속도감 있게 걸어서인지 추위는 느껴지지 않는다.
3. 인생에서 남겨야할 것 : 단단함 + 밝음으로 나아가는 자세
오늘도 혼자 걷는 길. 그 어느 날보다 발걸음은 바빴지만 오늘은 어떤 화두를 잡고 싶었다. '단단함' 이란 단어가 둥실 속에서 떠올라 붙들어 본다. 이 여행이 끝나고 나서 나에게 남겨질 첫 번 째 것은 바로 그것이 아닐까.
열흘 정도 걷고 보니 웬만한 오르막과 내리막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졌다. 종아리와 무릎에도 힘이 붙어 근육이 떨리거나 훅 꺾이는 일도 이제는 거의 없다. '중꺾마'는 모르겠지만 '중꺾몸'은 충분히 만들어져 가는 중. 마음이 몸을 지배할 수도 있지만 내 경우에는 몸이 먼저 만들어지면 마음이나 의식이 따라 올 때가 많았다. 단단한 몸을 만들고 마음도 함께 단단하게 만들어 갈 것. 함부로 휘둘리거나 스스로 자학하는 일을 앞으로 덜 만들어 가겠다. 그리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다짐을 여러 번 반복했다.
1시 넘어가니 오락가락하던 비도 그치고 구름 사이로 해도 잠깐 비추기 시작한다. 길동무 그림자로 반짝 다시 나타나고. 아 저 먼 곳에서부터 푸른 하늘빛도 조금씩 드러난다. 기분 좋아지게 오늘의 목적지 방향이 먼저 밝아진다. 안개나 비구름을 향해 나아가는 게 아니라 밝음을 향해 발걸음이 이어진다.
마지막 8km는 125번 국도와 나란히 걷는 길이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대형화물 트럭들, 여기에서도 성질 급하게 추월하느라 경적 울리며 내달리는 자가용들도 많다. 그래도 괜찮아. 나는 지금 밝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으니. 차소리 경적소리 잦아드는 순간순간 새소리가 들려올만큼 심적 여유도 있다.
4. 체력이 너무 좋아져서 문제?!
빗속에서 오히려 속도감있게 걸어서인가. 2시 반 경 오늘의 목적지 벨로라도에 도착. 오늘 문 연 알베르게는 한 곳뿐이다. 성당 두 곳에서 잠시 비 피한 걸 제외하면 거의 쉬지 않고 와서인지 지난 밤 숙소 동료들 중에선 내가 또 일착인가 보다.
문제는, 알베르게 주인장은 부재 중. 3시 반에 문 열러 온다는 메시지가 남겨져있다. 이런. 체력이 너무 좋아져서 문제. 21~22km는 이제 너무 수월해져서 애매한 느낌이다. 4~5km 정도 더 걸어 25~27km 정도가 딱 적당하다 싶다. 30km는 약간 버겁게 느껴지고.
검색해 보니 6.3 km 더 가 빌람비스티아 마을에 문 연 알베르게가 하나 더 보인다. 숙소 앞에서 죽치고 있기보다 오늘 좀 더 걸어보자 다시 길을 나선다. 햇볕에 젖은 물기가 날라가는 게 느껴져 기분도 나쁘지 않다.
5. 다시 치트키를 쓸 시간
4시 조금 넘어 다음 마을까지 넘어왔는데, 이런 문 연 알베르게가 없다. aprinca 라는 웹사이트에서 겨울철 문 여는 숙소정보를 업뎃해주는데 다시 확인하니 오늘자 아니라 어제자 정보다 ㅠㅠ. 와츠앱으로 숙소 주인과 교신하니 어제 순례객 한 명도 없어 오늘은 안 연다고.
어떻게 하지? 더 걷는 건 이제 무리인데... 전진하기도 되돌아가기도 모두 어려운 상태다.... 할 수 없다. 오늘이 다시 치트키 쓰는 날. 앞으로 두 구간은 20km 초반대이고, 중간 기착지 마을들의 규모도 작고 숙소도 상당히 열악한 편이다. 길도 대부분 오늘처람 국도변을 걷는 길. 재미 없는 길.
순례길에서 국도변으로 내려와 히치하이킹으로 인근 큰 도시 부르고스까지 나갈 궁리를 해 본다. 몇몇 차가 속도를 늦춰주기는 하는데 다들 중년의 아저씨들. 위험을 감수하기는 곤란한데. 다행히 부르고스행 택시가 눈에 들어온다. 미터기로 가면 50유로 정도 나온다는데 어차피 빈차로 가는 길 40유로에 가자고 딜을 했다.
택시 안에서 아고다로 검색해 호텔방을 하나 잡는다. 그 동안 쌓인 캐시를 이용해 예약비용은 따로 안 들었고. 그래서 오늘은 이불, 베개 넉넉한 더블침대 방에서 간만에 혼자만의 평화와 안락함을 누려본다. 욕조 가득 물 받아놓고 몸도 녹이고 빨래도 해 널고.
이틀치 걷는 길을 점핑을 해서 앞으로 표준코스로만 걸어도 29일 최종 목적지 산티아고 콤포스텔라에 무사히 들어갈 수 있게 스케쥴 조정도 되었다. 한 번은 해야했을 점핑 치트키는 이렇게 마무리. 이 여행의 마지막 치트키를 이렇게 사용한 걸로. 일단 오늘 만족도가 아주 높다. ㅎ
어제 새로 결성된 까미노그룹 벗들에게 점핑 소식을 전하며 부엔 까미노를 빌어주었다. 앞으로 새로운 길에서 또 다른 인연이 어찌 다가올 지 기대해봐야겠다.
이명주 박사님 ~♡감사합니다. 글을 통해 저도 그곳에 있는 듯 합니다. 교훈도 얻었습니다.
Jeoun Soon Lee 단순함 단단함 단아함저의 시니어 모토~
==> 역시 배울게 많은 큰언니 이십니다!!♡♡
Jongmi Kim 오늘자 순례길 풍경을 보면 왠지 모를 쓸쓸함이 느껴진다고 생각할즈음, 다 인생이 그렇지… 싶은 이쁜 하늘 그러다 조금 별로인 하늘, 쨍한 날, 그러다 비오고 한 걸을 떼어내기 힘든 날, 걸음 걸음마다 감사함이 넘치는 날, 그냥 하루가 형벌같이 느껴지는 날
박사님이 걸어가시는 순례길이 멀리서 지켜보는 이에게도 (걷는 순례자에 비하면) 개미걸음만큼이지만 성찰의 시간을 주시네요. 감사합니당! 오늘도 부엔 까미노!
=> 이렇게 같이 읽어주시고 같이 느껴주시고 응원해 주시는 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너무 감사해요, 생~
이진숙 밝음을 향해 나아가다!!!
Jinyoung Kwak 단단하고 밝은 엄박이 더 단단하고 밝아진다! 브라보!
=> 언니 앞으로 자주 걸어요~ 과천도 좋고, 다른 곳도 좋고~ 함께 단단해집시다. ㅎ
김현종 아호~~
김영희 밝음과 단단함 향해 앞으로~~
Kim Sun Joo 중꺽몸^^
김익배 엄박사님 잘 읽고 있는데 비가 자주오나봐요. 건강챙기면서걸으세요.
김태완 빗속에서 고생하셨습니다. 점핑 치트키가 요긴하게 쓰이네요 ㅎ
이지혜 2011년 2월에 부르고스부터 까미노길 걸었어요, 메세타쪽 걸을땐 황량합니다. (여긴 인적이 드물어서 순례자 여러명과 함께 걸으세요~) 글 읽으면서 오래된 제 추억도 꺼내봅니다.
=> 혼자 걸었지만 나쁘지 않았어요. 여름엔 너무 뜨거워 힘든 코스라는데, 날 좋은 날 많은 겨울이라 메세타 구간의 매력을 흠뻑 느꼈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