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올 것 같구나 (온타나스to프로미스타 35km)
1. 힘든 잠자리
어제도 긴 하루였는데 숙박객 중 가장 늦게 들어온 숙소는 열악했고, 멤버구성도 힘들었다. 그리 크지 않은 방 2층 침대로 꽉 찬 작은 숙소에서 11명 숙박객 중 8이 한국인. 나도 어디가서 만만찮게 시끄러운 편이지만, 한국인 여성1인과 스페인 여성 1인을 포함한 6명의 그룹이 왁자지껄 작은 숙소를 지배한다. 일주일 정도 크루로 같이 보낸 모양인데, 그들의 유대가 평균 이상 각별하니 혼자서 둘이서 조용히 보내고픈 이들에게는 불편한 수준이다.
게다가 보기에 참하게 보였던 한 20대 한국 청년은 기함할 정도의 코골이 선수. 코를 심하게 고는 수준을 넘어 드르렁드르렁 다음에 수면무호흡 상태로 자주 넘어간다. 저러다 숨 넘어가는 거 아닌가 걱정이 되서 바로 옆자리 이층을 차지한 나는 자는둥 마는 둥. 아 내일도 힘든 하루가 되겠구나... 나혼자만 힘든 건 아니었던지 나홀로 순례꾼들은 아침 6시 반부터 짐챙겨 먼저 길 떠나는 이들이 많다.
2. 겨울 순례꾼의 숙소잡기
호기롭게 떠나온 겨울 까미노지만 숙소 사정이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좋지 않다. 순례객이 절대적으로 주니 문 닫은 알베르게가 많다. 표준코스의 출도착지(20~30km 거리의 상대적으로 큰 마을)를 제외하고는 문 닫혀 있는 숙소가 많다. 가끔 작은 마을은 전체가 비어있는 느낌이 있을 정도.
순례길은 스페인 영토 전체에서 보면 시골이어서 마을에 남은 이들은 대체로 어르신들뿐이고 젊은이들 찾기는 어렵다. 마을 지날 때 '올라~' '올라~' '부엔 까미노' '무챠스 그라시아스' 인사를 주고받는 이들 대부분이 새벽 성당 다녀오는 할머니거나 개 델꼬 아침 산책 나온 할아버지들이 대부분이다. 젊은이들은 어디서나 시끌벅적 일자리도 있는 (대)도시서 살고 싶을 법하고. 한반도 2.5배 정도의 면적에 인구수는 한국보다 적으니 시골 마을의 인구밀도는 더 낮을수도 있겠다.
겨울 알베르게 구하는 일이 적어도 이번주 주말까지는 어려워보인다. 오늘도 그런 날. 표준코스대로 걷자면 온타나스에서 28.7km 브로델리아델까미노에 숙소를 잡는 게 좋은데, 실상은 20km 거리 이테로드라베가 아니면 34km 프로미스타를 가야 숙소를 잡을 수 있다. 무리가 되더라도 34km를 걷는 게 맞는 일정.
그래서 나도 오늘은 평소보다 매우 이른 8시에 길을 나선다. 어제에 이어 연속 30km 이상 걸어야하는 무리한 일정이긴 하지만 서둘러 걸어 5시 전에는 목적지에 닿아보자 다짐해본다.
3. 오늘의 경관 : 메세타 능선 넘기 + 물이 풍족했던
오늘 걷기의 최고난이도 코스는 해발고도 1천미터의 모스톨라레스 메세타 넘기. 출발 후 9km 지점에서 메세타 하나를 사선으로 넘어서야 했다. 경사도 12도의 급경사 구간.
숨고르기에 신경쓰며 오르막을 향해 차곡차곡 발걸음을 옮겨본다. 힘든 구간은 분명한데, 곡선으로 난 길 급경사와 완경사가 번갈아 있어 완급조절이 가능하다. 이 길에서 흥미로운 점은 따로 있었다. 거의 황무지 상태의 경사면에 등고선 따라 줄지어 소나무 묘목들이 식재되는 중이다.
내심 이 사서하는 고생길 산티아고 순례를 인생에서 다시 할까 싶었는데, 어느 새 자리를 잡아가는 묘목과 이미 군락이 된 경사면 하단의 소나무 식재 현장을 보며 처음으로 '저 나무들이 자리 잡아 이 사면이 사철 푸른 숲이 될 때 즈음에 그 경관을 보러 다시 오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나름 팔렌시아주(그러고보니 세번째 주를 지나는 중이다)의 농촌마을 지속가능 증진과 소득증대, 수자원 확보를 위한 장기발전 계획의 일환으로 보인다. 유실수가 아닌데 소득증대는 어찌되려나 싶기도하지만, 최소 2~30년을 내다보는 숲 조성 사업이 꼭 성공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나무 그늘이 울창해지면 여름철 순례객들에게도 좋은 일이겠지.
숲조성은 마을에서 먼 원거리 민둥산 뿐 아니라 마을입구에도 진행 중이다. 브로델리아 마을 입구에서도 비포장도로이자 순례길 양 옆으로 묘목식재가 한창이다. 성황당 격의 큰 나무 한그루가 아니라 숲이 반겨주는 마을 입구라니. 최소 10년 후면 이 마을의 입구 풍경이 달라지겠구나 기대가 된다.
그러고보니 오늘 걸은 길에서는 내내 물이 풍족한 편이다. 농경지에 수로가 대체로 갖추어져있고, 수로변엔 부들과 갈대 뿐 아니라 늘씬한 미류나무들도 줄지어 서 있다.
마지막 7km 브로델리아에서 프로미스타 사이에는 아예 운하가 만들어져 있다. 아마도 스페인(혹은 남부유럽)의 빵공장이란 별칭을 가진 이곳 메세타의 대규모 농장에서 생산된 밀이 과거에는 이 운하를 따라 운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곡창지대 및 이 지역을 다른 곳들과 연계하는 운하망 혹은 철도망(프로미스타 지역)의 발달은 이 지역의 과거와 현재를 만든 중요한 요소였을 듯 하다.
4. 새로운 길동무
어제 혼자여서 외로웠다는 말을 누가 들었는지 급경사 메세타의 정상에 오른 후 혼자 숨돌리며 오렌지 까먹는 와중에 한국인 청년 한 명이 짠 나타난다. 29살(이 나이가 또 순례 많이 오는 나이인듯 ㅎ) P군이다. J대학 약전(약학전문대) 학생인데, 역시 생각이 깊고 책읽기 좋아하는 친구다. 5년전 약전편입 시험 마치고 지금처럼 겨울 까마노 일주 경험이 있는 친구다.
어떨 때는 혼자가 아니라 함께 걸을 때 생각의 물꼬가 트이는 경우도 있다. 오늘은 그런 날.
[나] 한 번 와 봤는데, 왜 또 왔어요? 20대에게 재밌는 여행지도 많잖아요?
[P] 저는 여기가 좋았어요. 다시 오고 싶을만큼. 음 저는 '고생하는 여행'이 더 좋더라고요. 기억에도 남고. 저 사람들과 관계맺고 이어가는 거 힘들어하는 편인데, 여기서 만난 사람들과는 같이 고생하니까 금새 친해지는 게 좋았어요. 한국에서 공부할 때도 여기서 힘들었던 거 생각하면, 한국서 힘든 것도 덜 힘들 게 느껴지기도 하고. 일상에서 힘든 걸 견디게 하는 힘을 주는 거 같아요. 이 길은. 그래서 저는 아마 다음 여름에도 또 오게 될 거 같아요.
고생하는 여행이라. 그래서 더 기억에 남고 다시 하고픈 여행이라니. P군의 산티아고에 대한 감상에서 여러 생각이 꼬리를 물고 펼쳐지더군요. 그럴 수도 있는 거구나. 내가 그제 떠올린 여행 이후의 단단해짐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결이 있는 화두가 아닐까 싶다.
길동무와는 3시간 정도 같이 걷다가 각자의 속도에 맞춰 다시 헤어졌다. 어제 40km를 걸어 조금 힘들어하는 p군을 뒤로 하고 이번엔 내가 치고 나가는 쪽이 되었고. 이 길은 걷는 동안 P 군과도 앞서거니 뒷서거니 자주 마주칠 거 같다. 속 깊은 친구, 어리지만 서로의 배움을 나눌 수 있는 길동무.
하루 종일 무겁게 내려앉은 짙고 잔뜩 흐린 하늘 아래 눌리는 기분이었는데, 목적지 방향이 다시 밝아져 오고 있다. 그래서 오늘도 다시 나는 밝음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순례길 중 최대거리를 걸어와 고된 날이었으나 마음은 편안했던, 오늘은 또 그런 날!
이해창 이런 사진이 정말 귀하더라구요. 콩과 밀의 윤작도 막상 관련 사진을 찾으려면 정말 찾기 어려워서... 건강하시고 좋은 사진 계속 부탁드립니다
윤신원 하루에 정말 많이 걸었네. 몸상태 살피면서 여행해. 몸은 고되지만 마음은 편안했던 오늘… ^^
김익배 엄박사님 잘 정리하셨다가 산티아고순례길 단행본 하나 내시지요. 그럴려면. 건강 더 챙기시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