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의 시간(팔라스데레이 to 아르수아 29km)
1. 빗속의 순례길 : 생각하기 좋은 날
어제의 청명한 하늘과는 달리 오늘은 다시 비. 오전에는 제법 내렸고, 오후에도 간간히 비가 뿌려졌다. 지난 며칠에 비해 거리도 조금 늘린데다 비까지 오니 힘은 좀 들었다. 오르막도 많았지만 내리막 경사도 급해 속도내기도 어려웠던.
비가 오면 시야가 좁아지고 땅을 주로 보고 걸어야해서 경관을 즐기기도 사진을 찍기도 어렵다. 길동무와 대화하기도 어려우니 혼자 걷는 기분. 그럼 좀 쉬면되지 생각할 수도 있는데, 오늘 포함 순례는 3일이면 끝나고 또 이후 일정들이 있다보니 순례객 대부분이 그냥 걷기를 선택한다.
이런 날은 오히려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생각을 정리하는 것도 좋지라고 의미를 부여하며 묵묵히 걸어본다. 대서양을 끼고 있고 동북쪽에 큰 산맥이 있다보니 갈리시아주는 서북풍이 부는 겨울 시즌에 눈비가 많다. 여러 후기를 찾아봐도 겨울 까미노에서 갈리시아 구간은 늘 비온다고 생각하고 우비 필수, 무리하지 말 것!이 주의사항으로 포함되어있다. 이 구간에서 첫 비를 만난것이니(남은 이틀은 비 없음) 이 여행에서 날씨운은 여전히 좋은 것이라 자위해본다.
사리아 이후 순례객들이 확연히 늘어난 게 느껴진다. 사리아를 출발지로 삼은 이들은 주로 유럽인들. 갈리시아주 안의 115.4km를 일주일 정도 코스로 걷기를 선택한 건데, 이곳에서 시작해도 크리덴샬(여행자 여권이라 불리는 스탬프 찍는 증서)을 발급받고 최종목적지 산티아고에 도착하면 순례증명서를 발급받을 수 있다. 일주일 짐이니 무엇보다 가방이 가볍다. 가까이 살고 있는 사람들의 특권이 부러울 따름이다. 오기 쉽지 않으니 한번에 전 코스를 다 돌아야하는 우리와는 사정이 많이 달라보인다.
2. 따로 또 같이 : 인연은 인연으로 이어지고
오늘 구간의 중간에 자리한 Melide라는 도시에서 점심을 먹는다. 메뉴는 뽈뽀(갈리시아식 문어요리)와 피미엔토스(고추튀김). 한국 순례객들 후기에 꼭 등장하는 에피인데, 멜리데 신시가지 들어서자마자 문밖에 나와 한국어로 호객행위하는 스페인 요리사가 있다. 한국어 몇마디 해주는 게 신기하기도하고 고맙기도하고. 맛도 우리 입맛에 맞는 집이라 한국인 순례객들은 대체로 이 가게에서 한끼 식사를 하게된다.
K 선생과 나도 못이기는 척 들어가 조금 늦은 점심식사를 한다. 요리 나오기를 기다리는데, K 선생이 입을 연다.
<K와의 대화>
ㅡ 선생님, 저는 오늘 여기까지만 걸을께요.
ㅡ 그래 비 와서 그런가 자기 오늘 잘 못 걷더라. 아르수아 전까지 문 연 알베 별로 없고 있더라도 마을이 너무 작아. 쉴거면 도시에서 쉬는 게 낫지.
ㅡ 아르수아(점심 이후 15km 더 걸어야함) 까지는 못 갈 거 같아요.
ㅡ 그래요, 잘 선택했어요. 나는 선생님 지금껏 안 아픈게 신기했어. 몸이 적응하느라 3~4일차에 대체로 아파서 좀 쉬었다가는데, 선생님 안 쉬었잖아요. 그리고 샘도 나말고 다른 길동무도 사귀어보시고. ㅎ
ㅡ 저도 이제 이틀 남는 건데 앞으로 좀 고독하게 걸어볼래요.
ㅡ 그래요. 우리 토요일 산티아고에서 만나 뒤풀이 같이 합시다. ^^
정종 잔 같은 그릇에 담긴 화이트와인으로 건배하며, 이렇게 잠시 이별의 정을 나눈다. 세어보니 K선생과 벌써 11일째, 길동무, 밥동무, 잠동무를 했다. 전공도 같고, 경관 즐기는 것도 같고, 걷는 속도와 역량 비슷해서 레온 이후 쭉 같이 해올 수 있었다. 이 인연 최종 목적지 산티아고 그리고 한국에서도 이어질거라 믿어 본다.
K 선생과 헤어져 15km 떨어진 오늘의 목적지 아르수아로 혼자 발걸음을 옮긴다. 구릉지 여러개를 넘는 구간(오르막-내리막이 몇 차례 반복된다는 얘기)이고, 조림지와 방목지를 지나는 비포장도로라 진흙탕길도 자주 나온다. 앞으로 3시간 반 잡고 5시 전에 들어가보자 서둘러 움직여 본다.
빠른 걸음으로 걷다보니 저 앞에 두 순례객이 보인다. 흐린날 깊은 숲길에서 간만에 혼자 걷는 길 좀 긴장하고 있었는데 다른 순례객들 보니 반갑기 그지없다. 오늘의 목적지가 같다는 의미이니 지도앱 안 열고 저들만 따라가면 되서 한결 맘이 편해진다. 어~ 그런데 둘 중 한 청년이 속도를 줄이더니 아예 걸음을 멈추고 나를 기다리는 듯하다. 무슨 일이지?
<A와의 대화>
ㅡ 선생님, 여전히 잘 걷고 계시네요. 같이 걸어도 되죠?
ㅡ 어머, 반갑다. 그럼그럼 같이 걸어주면 내가 더 고맙지. 근데 저기 같이 가던 동생 두고 나랑걸어도 되요?
ㅡ J는 매일 이 시간에 엄마랑 여자친구랑 한시간씩 통화해요. 그거 하는 조건으로 여기 오는 거 허락받았대요.
ㅡ 아하~ 근데, J 되게 다정한 아들, 다정한 남친이다. ㅎ
ㅡ 저 선생님이랑 같이 한 번 같이 걷고 싶었어요.
ㅡ 어머, 왜~~?
ㅡ D형이랑, J가 선생님하고 얘기하면서 걷는 거 재밌데요. 배우는 것도 많고.
ㅡ 앗, 나 꼰대질 했다는 거야?ㅋ
ㅡ 아니예요, 선생님이 먹을 것도 잘 나눠주고 좋은 얘기 해준다고. ㅡ D랑 P가 그렇게 말해쥤어? 20대들이 아줌마랑 걸어준 게 나는 더 고마운데! 우와 감동감동~~
ㅡ 선생님 저말고 L누나랑 M한테 약도 다 나눠주셨다면서요. 참 저 어제 그제 이틀 동안 L누나랑 같이 걸었어요. 근데 샘이 주신약 비싼 거라면서요? 저는 그 때 그 약 먹고 감기 다 나은 거 같아요.
ㅡ ㅎ 맞아. 그 약은 좀 비싸기는 했어. 그래도 뭐, 나 먹고 남은 거니까 준건데요. 20대들하고 나는 다르지. 나는 돈 버는 사람이잖아.
ㅡ 선생님 서울대시라면서요?
ㅡ 헉... 음... L한테 들었구나. ㅎ 맞는데, 여기서 그게 뭐가 중요해. 공부를 오래하기는 했는데, 나는 내 직업세계에서 성공하지 못했어. 나 한국 들어가면 이제 백수야~~
ㅡ 그래도. 그래도 그래서 선생님이 좋은 말 해준다고.
ㅡ 그런 건 공부하는 거랑 상관 없어. 나 그냥 사람 사귀는 거 좋아하는 오지랖쟁이야. 참 근데 자기 이름은 뭐야? 같이 걸을 건데 이제 이름도 알고 카톡도 따자.
ㅡ A입니다.
ㅡ 나는 엄. 글고, 전에 뭐 시험준비한다고 들었는데, 어떤 시험인지 물어봐도 돼요?
...........
이후 1시간 반 넘게 이런저런 얘기 나누다가 오늘의 목적지 아르수아 공립 알베르게까지 둘이, 나중엔 통화 끝낸 J까지 셋이 사이좋게 걸어왔다는.
사실 나에게 동행 제안한 A는 온타나스 숙소에서 나를 엄청 힘들게했던 코골이 청년. (ㅋ) 남의 집 귀한 아들을 코골이 청년으로만 기억할 뻔 했는데, 오늘 이렇게 다시 만나며 같이 걷고 사는 얘기 같이 나누는 새로운 길동무, 저녁 밥동무까지 되었답니다~ ^^
두 청년은 내일 산티아고까지 39km 끝낸다고 아침 일찍 출발할 예정이란다. 길 위의 인연은 이제 끝나더라도 한국서 꼭 보자고, 특히 A는 공무원 시험준비하러 신림동 올 예정이라 동네에서 보기로 약속도 했다.
3. 선물의 시간
산티아고를 왜 왔냐는 질문에 대해, 직장 그만두고 시간이 생겨서, 속상한 것들 내려놓으려고, 앞으로 어떻게 & 뭐 먹고 살아야하나 생각해 보려고 등등으로 답해왔었다.
사실 인생의 숙제와 고민에 사로잡혔던 지난 며칠은 잠을 제대로 못자는 날이 많았었다.. 답 없는 걱정하지 말고, 현재에 집중하자 다짐했지만 남은 일정이 줄어들수록 마음이 무거워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생각했다.
그런데 지난 기록을 뒤적거리다가 파리에서 초빙교수 초대장이 왔던 때, 파리 체류에 이어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올렸을 때, 그리고 파리생활 초창기 때 쓴 글들이 새롭게 떠올랐다. 당시의 나는 기대와 흥분으로 가득찬 시간 속에 있었고, 그 때 생각했던 이 순례길은 "그 동안 수고한 나를 위해 내가 나에게 주는 선/물/"이었다.
평소에도 걷는 거, 등산하는 거 좋아했던 사람에게, 원없이 걷고 또 걷고, 오르고 또 오르고 그러다 다시 내려오는 일만 반복하면 그러면 어떤 목적지에 가 닿게 되는, 의미도 있고, 몸도 마음도 건강해 질 것이 자명한 오롯한 한 달이 생기는 것이다. 이 길을 걷고 나면 당연히 살도 빠지고, 건강해지고, 단단한 내가 될 것이라 기대가 컸었다.
짧게는 지난 10년 연구소 생활하면서, 길게는 결혼 이후 줄곧 사회운동하는 남편 대신 가정 경제를 책임지며 살아냈다. 지난 8월 계약직 연구원의 임용이 만료되면서 실업자가 되기는 했는데, 그 때 남편과 딸에게 선언했다.
"이제 우리 집은 성인 셋이 사는 집. 가족의 일과 역할은 이어가겠지만 이제 우리는 각자 잘 살자. 나는 이제 이 집 가장 안 할란다. 퇴직금 받아 앞으로 일년은 놀 것이다."
그렇게 일년 노는 일정의 앞 자리에 광주에서의 두달, 파리와 산티아고를 포함하는 유럽체류가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고. 이런 생각을 하게 되자 마음이 정말 편안해지고 실제로도 걷는 일에 집중하고 또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지금 선물을 누리고 있는 중이니까! ㅎ
걷는 동안, 당연히 몸은 고되고 마음도 때때로 무거웠지만, 더 많은 시간 경관과 사람들 덕분에 행복했었다. 만족스럽고 뿌뜻한 시간이 힘든 시간보다 훨씬 길었다. 게다가 이건 나 혼자 내 마음 속에서나 느끼는 것이라 여겼는데, 오늘 A와의 대화를 나누며 이 길에서 만난 인연들에게(특히 20대 한국청년들!) 나의 만족과 기쁨을 나눠줬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 셈. 이 길 위에서도 나는 여전히 나답게 살아냈다는 일종의 안도감.
이 여행에서 셀프기프트 뿐 아니라 나를 둘러싼 세계와 관계로부터 찐선물을 받은 기분이다. 힘 내서 남은 이틀도 찬찬히 다시 걸어내야지.
산티아고까지 이제 남은 거리 39.2km1
Jongmi Kim 아, 사각사각 낙엽밝으며 축축하고 신선한 공기 들이마시며 새소리를 bgm삼아 걷는 느낌을 서술하시오.
나 : 쥑이네.
이효정 와......정말 다 왔다!! 마지막까지 건강히!!
==> ㅎ 진짜진짜. 너무 건강해져서 탈 안 나게 할께요!
Ki Yeon Koo 선생님. 선물 흠뻑 누리고 완주하셔요!!!!
==> 고맙습니다. 남은 길이 얼마 안 되어 아쉽고 서운한 마음이 들지만 끝까지 잘 걸어볼께요.
김태완 당장이라도 짐을 꾸려 산티아고순례길로 떠나고 싶네요. 이틀 밖에 남지 않았다고 하니 많이 아쉽습니다.
==> 인생에 한 번은 도전! ㅎ 자신을 위한 여행으로 기획해 보세요~
박명기 더 재미있는 삶이, 더 완성된 날들이 기다릴 겁니다
===> 고맙습니다. 산티아고 선배님
오윤홍 오늘 글은 특히 더 좋아요~^^
===> 나의 고갱이를 찾아 귀하게 여겨보려고요. 한국에서 뵈요~!!!
Young-sun Kim 修行!
==> 대사님 감사합니다. 올해도 강건하세요!^^
===> 엄 박사님 그간 너무 치열하게만 살아오신 것 같아요. 주변도 살피면서 자신도 돌봐야할 때가 되셨다고 봅니다
나효우 산티아고 인생길. 걸을때는 언제 도착하나 했는데, 어느 구간부터는 남은 길이 살짝 아쉽더라고요. 그동안 잘 걸었으니 앞으로도 잘 해나갈겁니다.
==> 네 남은 길이 아까워 오늘내일은 더 음미하며 걸어보려합니다!
Hiroshi Todoroki 저도 멜리데 초입 긴 오르막길 끝에서 문어랑 가리시아식 토티야(감자 든 계란말이 같은 거?) 먹었습니다 Garnacha 라는 통나무 테이블의 가게.. 그런데 독하게 걸을 땐 배불리 먹지 못하더라고요. 배 채우면 걸으며 힘들어지는 거 몸이 기억해서 배 용량 중 한 70% 정도..
==> 같은 가게. 근데 희한하게 이 길 걸으며 일본인은 못 봤네요. 일본에서는 순례길 여행 붐이 끝난 건지 궁금합니다, 선생님~
==> 제가 걸었던 11년 전엔 동양인 자체가 드물었습니다. 산티아고 성당 미사 때 딱 1명?
요즘 엔화가 약해서 일본인이 유럽여행 잘 안 가기도 하고 아직 대학생이 방학 아니어서 더욱 그럴수도…
수수팥떡 남은 이틀~더 즐겁고 행복한 걸음 되시길~~
==> 한결 같은 응원 고맙습니다!!!^^
김용호 대단하십니다!
Heejoon Yang 세상에 잘 쓰일 은희, 걱정 말고 순례 잘 누리거래이~
==> 이리 말해줘서 고마워. 나의 대학 첫 CC(combat cell, 콧구멍코딱지) ^^ 빛나지 않아도 내 세계 안에서 나의 쓰임새 잘 생각해 볼께~
이영수 순례길기행 읽는 재미가 쏠쏠했는데.. 이제 하루하루가 아쉽네
==> 나도 아쉬운데 중간에 끊기 어려워서 한큐에 끝냈다오. 2월에도 농사일(한해농사 준비) 있지? 몸 좋을 때 함 내려갈께, 친구야~^^
Sunhwa Kim 선물 충분히 누릴 자격 있습니다!! 마음 편~~~히,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요 ㅎㅎ
==> 저도 그리 생각하는데, 날씨가, 경관이, 길동무가 주는 행복이 내 기대와 상상 이상이예요~ 이러면 또 나도 더 갚고 싶어지는데 ㅋㅋㅋ (빚지고 못 사는 성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