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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은희 Sep 01. 2023

산티아고일기(2023/01/26) : 순례 26일차

선물의 시간(팔라스데레이 to 아르수아 29km)

1. 빗속의 순례길 : 생각하기 좋은 날


어제의 청명한 하늘과는 달리 오늘은 다시 비. 오전에는 제법 내렸고, 오후에도 간간히 비가 뿌려졌다. 지난 며칠에 비해 거리도 조금 늘린데다 비까지 오니 힘은 좀 들었다. 오르막도 많았지만 내리막 경사도 급해 속도내기도 어려웠던.


비가 오면 시야가 좁아지고 땅을 주로 보고 걸어야해서 경관을 즐기기도 사진을 찍기도 어렵다. 길동무와 대화하기도 어려우니 혼자 걷는 기분. 그럼 좀 쉬면되지 생각할 수도 있는데, 오늘 포함 순례는 3일이면 끝나고 또 이후 일정들이 있다보니 순례객 대부분이 그냥 걷기를 선택한다. 


이런 날은 오히려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생각을 정리하는 것도 좋지라고 의미를 부여하며 묵묵히 걸어본다. 대서양을 끼고 있고 동북쪽에 큰 산맥이 있다보니 갈리시아주는 서북풍이 부는 겨울 시즌에 눈비가 많다. 여러 후기를 찾아봐도 겨울 까미노에서 갈리시아 구간은 늘 비온다고 생각하고 우비 필수, 무리하지 말 것!이 주의사항으로 포함되어있다. 이 구간에서 첫 비를 만난것이니(남은 이틀은 비 없음) 이 여행에서 날씨운은 여전히 좋은 것이라 자위해본다. 


사리아 이후 순례객들이 확연히 늘어난 게 느껴진다. 사리아를 출발지로 삼은 이들은 주로 유럽인들. 갈리시아주 안의 115.4km를 일주일 정도 코스로 걷기를 선택한 건데, 이곳에서 시작해도 크리덴샬(여행자 여권이라 불리는 스탬프 찍는 증서)을 발급받고 최종목적지 산티아고에 도착하면 순례증명서를 발급받을 수 있다. 일주일 짐이니 무엇보다 가방이 가볍다. 가까이 살고 있는 사람들의 특권이 부러울 따름이다. 오기 쉽지  않으니 한번에 전 코스를 다 돌아야하는 우리와는 사정이 많이 달라보인다.


2. 따로 또 같이 : 인연은 인연으로 이어지고


오늘 구간의 중간에 자리한 Melide라는 도시에서 점심을 먹는다. 메뉴는 뽈뽀(갈리시아식 문어요리)와 피미엔토스(고추튀김). 한국 순례객들 후기에 꼭 등장하는 에피인데, 멜리데 신시가지 들어서자마자 문밖에 나와 한국어로 호객행위하는 스페인 요리사가 있다. 한국어 몇마디 해주는 게 신기하기도하고 고맙기도하고. 맛도 우리 입맛에 맞는 집이라 한국인 순례객들은 대체로 이 가게에서 한끼 식사를 하게된다.


K 선생과 나도 못이기는 척 들어가 조금 늦은 점심식사를 한다. 요리 나오기를 기다리는데, K 선생이 입을 연다. 


<K와의 대화>


ㅡ 선생님, 저는 오늘 여기까지만 걸을께요. 

ㅡ 그래 비 와서 그런가 자기 오늘 잘 못 걷더라. 아르수아 전까지 문 연 알베 별로 없고 있더라도 마을이 너무 작아. 쉴거면 도시에서 쉬는 게 낫지.

ㅡ 아르수아(점심 이후 15km 더 걸어야함) 까지는 못 갈 거 같아요. 

ㅡ 그래요, 잘 선택했어요. 나는 선생님 지금껏 안 아픈게 신기했어. 몸이 적응하느라 3~4일차에 대체로 아파서 좀 쉬었다가는데, 선생님 안 쉬었잖아요. 그리고 샘도 나말고 다른 길동무도 사귀어보시고. ㅎ

ㅡ 저도 이제 이틀 남는 건데 앞으로 좀 고독하게 걸어볼래요. 

ㅡ 그래요. 우리 토요일 산티아고에서 만나 뒤풀이 같이 합시다. ^^


정종 잔 같은 그릇에 담긴 화이트와인으로 건배하며, 이렇게 잠시 이별의 정을 나눈다. 세어보니 K선생과 벌써 11일째, 길동무, 밥동무, 잠동무를 했다. 전공도 같고, 경관 즐기는 것도 같고, 걷는 속도와 역량 비슷해서 레온 이후 쭉 같이 해올 수 있었다. 이 인연 최종 목적지 산티아고 그리고 한국에서도 이어질거라 믿어 본다.


K 선생과 헤어져 15km 떨어진 오늘의 목적지 아르수아로 혼자 발걸음을 옮긴다. 구릉지 여러개를 넘는 구간(오르막-내리막이 몇 차례 반복된다는 얘기)이고, 조림지와 방목지를 지나는 비포장도로라 진흙탕길도 자주 나온다. 앞으로 3시간 반 잡고 5시 전에 들어가보자 서둘러 움직여 본다.


빠른 걸음으로 걷다보니 저 앞에 두 순례객이 보인다. 흐린날 깊은 숲길에서 간만에 혼자 걷는 길 좀 긴장하고 있었는데 다른 순례객들 보니 반갑기 그지없다. 오늘의 목적지가 같다는 의미이니 지도앱 안 열고 저들만 따라가면 되서 한결 맘이 편해진다. 어~ 그런데 둘 중 한 청년이 속도를 줄이더니 아예 걸음을 멈추고 나를 기다리는 듯하다. 무슨 일이지?


<A와의 대화>


ㅡ 선생님, 여전히 잘 걷고 계시네요. 같이 걸어도 되죠?

ㅡ 어머, 반갑다. 그럼그럼 같이 걸어주면 내가 더 고맙지. 근데 저기 같이 가던 동생 두고 나랑걸어도 되요?

ㅡ J는 매일 이 시간에 엄마랑 여자친구랑 한시간씩 통화해요. 그거 하는 조건으로 여기 오는 거 허락받았대요.

ㅡ 아하~ 근데, J 되게 다정한 아들, 다정한 남친이다. ㅎ 

ㅡ 저 선생님이랑 같이 한 번 같이 걷고 싶었어요.

ㅡ 어머, 왜~~?

ㅡ D형이랑, J가 선생님하고 얘기하면서 걷는 거 재밌데요. 배우는 것도 많고.

ㅡ 앗, 나 꼰대질 했다는 거야?ㅋ

ㅡ 아니예요, 선생님이 먹을 것도 잘 나눠주고 좋은 얘기 해준다고. ㅡ D랑 P가 그렇게 말해쥤어? 20대들이 아줌마랑 걸어준 게 나는 더 고마운데! 우와 감동감동~~

ㅡ 선생님 저말고 L누나랑 M한테 약도 다 나눠주셨다면서요. 참 저 어제 그제 이틀 동안 L누나랑 같이 걸었어요. 근데 샘이 주신약 비싼 거라면서요? 저는 그 때 그 약 먹고 감기 다 나은 거 같아요.

ㅡ ㅎ 맞아. 그 약은 좀 비싸기는 했어. 그래도 뭐, 나 먹고 남은 거니까 준건데요. 20대들하고 나는 다르지. 나는 돈 버는 사람이잖아.

ㅡ 선생님 서울대시라면서요?

ㅡ 헉... 음... L한테 들었구나. ㅎ 맞는데, 여기서 그게 뭐가 중요해. 공부를 오래하기는 했는데, 나는 내 직업세계에서 성공하지 못했어. 나 한국 들어가면 이제 백수야~~

ㅡ 그래도. 그래도 그래서 선생님이 좋은 말 해준다고.

ㅡ 그런 건 공부하는 거랑 상관 없어. 나 그냥 사람 사귀는 거 좋아하는 오지랖쟁이야. 참 근데 자기 이름은 뭐야? 같이 걸을 건데 이제 이름도 알고 카톡도 따자. 

ㅡ A입니다.

ㅡ 나는 엄. 글고, 전에 뭐 시험준비한다고 들었는데, 어떤 시험인지 물어봐도 돼요?

...........



이후 1시간 반 넘게 이런저런 얘기 나누다가 오늘의 목적지 아르수아 공립 알베르게까지 둘이, 나중엔 통화 끝낸 J까지 셋이 사이좋게 걸어왔다는.


사실 나에게 동행 제안한 A는 온타나스 숙소에서 나를 엄청 힘들게했던 코골이 청년. (ㅋ) 남의 집 귀한 아들을 코골이 청년으로만 기억할 뻔 했는데, 오늘 이렇게 다시 만나며 같이 걷고 사는 얘기 같이 나누는 새로운 길동무, 저녁 밥동무까지 되었답니다~ ^^


두 청년은 내일 산티아고까지 39km 끝낸다고 아침 일찍 출발할 예정이란다. 길 위의 인연은 이제 끝나더라도 한국서 꼭 보자고, 특히 A는 공무원 시험준비하러 신림동 올 예정이라 동네에서 보기로 약속도 했다.


3. 선물의 시간


산티아고를 왜 왔냐는 질문에 대해, 직장 그만두고 시간이 생겨서, 속상한 것들 내려놓으려고, 앞으로 어떻게 & 뭐 먹고 살아야하나 생각해 보려고 등등으로 답해왔었다.


사실 인생의 숙제와 고민에 사로잡혔던 지난 며칠은 잠을 제대로 못자는 날이 많았었다.. 답 없는 걱정하지 말고, 현재에 집중하자 다짐했지만 남은 일정이 줄어들수록 마음이 무거워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생각했다. 


그런데 지난 기록을 뒤적거리다가 파리에서 초빙교수 초대장이 왔던 때, 파리 체류에 이어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올렸을 때, 그리고 파리생활 초창기 때 쓴 글들이 새롭게 떠올랐다. 당시의 나는 기대와 흥분으로 가득찬 시간 속에 있었고, 그 때 생각했던 이 순례길은 "그 동안 수고한 나를 위해 내가 나에게 주는 선/물/"이었다.


평소에도 걷는 거, 등산하는 거 좋아했던 사람에게, 원없이 걷고 또 걷고, 오르고 또 오르고 그러다 다시 내려오는 일만 반복하면 그러면 어떤 목적지에 가 닿게 되는, 의미도 있고, 몸도 마음도 건강해 질 것이 자명한 오롯한 한 달이 생기는 것이다. 이 길을 걷고 나면 당연히 살도 빠지고, 건강해지고, 단단한 내가 될 것이라 기대가 컸었다.


짧게는 지난 10년 연구소 생활하면서, 길게는 결혼 이후 줄곧 사회운동하는 남편 대신 가정 경제를 책임지며 살아냈다. 지난 8월 계약직 연구원의 임용이 만료되면서 실업자가 되기는 했는데, 그 때 남편과 딸에게 선언했다. 


"이제 우리 집은 성인 셋이 사는 집. 가족의 일과 역할은 이어가겠지만 이제 우리는 각자 잘 살자. 나는 이제 이 집 가장 안 할란다. 퇴직금 받아 앞으로 일년은 놀 것이다."


그렇게 일년 노는 일정의 앞 자리에 광주에서의 두달, 파리와 산티아고를 포함하는 유럽체류가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고. 이런 생각을 하게 되자 마음이 정말 편안해지고 실제로도 걷는 일에 집중하고 또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지금 선물을 누리고 있는 중이니까! ㅎ


걷는 동안, 당연히 몸은 고되고 마음도 때때로 무거웠지만, 더 많은 시간 경관과 사람들 덕분에 행복했었다. 만족스럽고 뿌뜻한 시간이 힘든 시간보다 훨씬 길었다. 게다가 이건 나 혼자 내 마음 속에서나 느끼는 것이라 여겼는데, 오늘 A와의 대화를 나누며 이 길에서 만난 인연들에게(특히 20대 한국청년들!) 나의 만족과 기쁨을 나눠줬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 셈. 이 길 위에서도 나는 여전히 나답게 살아냈다는 일종의 안도감. 


이 여행에서 셀프기프트 뿐 아니라 나를 둘러싼 세계와 관계로부터 찐선물을 받은 기분이다. 힘 내서 남은 이틀도 찬찬히 다시 걸어내야지.


산티아고까지 이제 남은 거리 39.2km1


물많고 숲도 많은 가르시아주
꽃을 이마에 이고 있는 시골집

Jongmi Kim 아, 사각사각 낙엽밝으며 축축하고 신선한 공기 들이마시며 새소리를 bgm삼아 걷는 느낌을 서술하시오.

나 : 쥑이네.

봐도봐도 흥미로운 옥수수창고
지그은 기능을 잃은 정원 조경이지만 과거의 기능을 알려주는 (옥수수가 매달려있음) 햇볕 잘 들고 건조하기 좋은 구조 = 비맞은 냥이 몸도 말리기 좋은 장소
집안 잔치가 있는가 봄. (돼지가 통채로 매달린. 피 빼는 중인 듯)
멜리데 들어오니 파란 하늘이!
멜리데 신시가지 입구. 순례객을 반겨주는 벽화
K샘 산티아고에서 만나요~~
멜리데 산타마리아 성당
아르수아 입구. 순례객을 반겨주는 벽화


이효정 와......정말 다 왔다!! 마지막까지 건강히!!

  ==>  ㅎ 진짜진짜. 너무 건강해져서 탈 안 나게 할께요!

Ki Yeon Koo 선생님. 선물 흠뻑 누리고 완주하셔요!!!!

  ==> 고맙습니다. 남은 길이 얼마 안 되어 아쉽고 서운한 마음이 들지만 끝까지 잘 걸어볼께요.

김태완 당장이라도 짐을 꾸려 산티아고순례길로 떠나고 싶네요. 이틀 밖에 남지 않았다고 하니 많이 아쉽습니다.

==> 인생에 한 번은 도전! ㅎ 자신을 위한 여행으로 기획해 보세요~

박명기 더 재미있는 삶이, 더 완성된 날들이 기다릴 겁니다

===> 고맙습니다. 산티아고 선배님

오윤홍 오늘 글은 특히 더 좋아요~^^

  ===>  나의 고갱이를 찾아 귀하게 여겨보려고요. 한국에서 뵈요~!!!

Young-sun Kim 修行!

  ==> 대사님 감사합니다. 올해도 강건하세요!^^

  ===> 엄 박사님 그간 너무 치열하게만 살아오신 것 같아요. 주변도 살피면서 자신도 돌봐야할 때가 되셨다고 봅니다

나효우 산티아고 인생길. 걸을때는 언제 도착하나 했는데, 어느 구간부터는 남은 길이 살짝 아쉽더라고요. 그동안 잘 걸었으니 앞으로도 잘 해나갈겁니다.

==> 네 남은 길이 아까워 오늘내일은 더 음미하며 걸어보려합니다!


Hiroshi Todoroki 저도 멜리데 초입 긴 오르막길 끝에서 문어랑 가리시아식 토티야(감자 든 계란말이 같은 거?) 먹었습니다 Garnacha 라는 통나무 테이블의 가게.. 그런데 독하게 걸을 땐 배불리 먹지 못하더라고요. 배 채우면 걸으며 힘들어지는 거 몸이 기억해서 배 용량 중 한 70% 정도..

 ==> 같은 가게. 근데 희한하게 이 길 걸으며 일본인은 못 봤네요. 일본에서는 순례길 여행 붐이 끝난 건지 궁금합니다, 선생님~

 ==> 제가 걸었던 11년 전엔 동양인 자체가 드물었습니다. 산티아고 성당 미사 때 딱 1명?

요즘 엔화가 약해서 일본인이 유럽여행 잘 안 가기도 하고 아직 대학생이 방학 아니어서 더욱 그럴수도…

수수팥떡 남은 이틀~더 즐겁고 행복한 걸음 되시길~~

 ==> 한결 같은 응원 고맙습니다!!!^^

김용호 대단하십니다!

Heejoon Yang 세상에 잘 쓰일 은희, 걱정 말고 순례 잘 누리거래이~

 ==> 이리 말해줘서 고마워. 나의 대학 첫 CC(combat cell, 콧구멍코딱지) ^^ 빛나지 않아도 내 세계 안에서 나의 쓰임새 잘 생각해 볼께~

이영수 순례길기행 읽는 재미가 쏠쏠했는데.. 이제 하루하루가 아쉽네

==> 나도 아쉬운데 중간에 끊기 어려워서 한큐에 끝냈다오. 2월에도 농사일(한해농사 준비) 있지? 몸 좋을 때 함 내려갈께, 친구야~^^

Sunhwa Kim 선물 충분히 누릴 자격 있습니다!! 마음 편~~~히,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요 ㅎㅎ

==> 저도 그리 생각하는데, 날씨가, 경관이, 길동무가 주는 행복이 내 기대와 상상 이상이예요~ 이러면 또 나도 더 갚고 싶어지는데 ㅋㅋㅋ (빚지고 못 사는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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