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털 밥상
일주일에 한 번씩은 마트로 장을 보러 다닌다. 요즘은 온라인 배송을 많이 이용한다지만, 편리함보다는 익숙함을 추구하는 30대 후반에게 인터넷 장보기는 그다지 매력적인 구매 방식이 아니다. 우리는 직접 보고 담을 수 있는 아날로그식 장보기를 선호한다. 신선식품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고 다양한 상품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한데, 덤으로 대화와 걷기가 동반되는 활동이 정서적·신체적으로도 제법 유익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다만, 아날로그식 장보기를 할 때 조심해야 하는 점이 있다. 바로 충동구매. 마트는 카트를 밀면서 구경하다가 "아, 이거 필요했는데"라며 장바구니에 담거나, 잘 쓰는 제품이 1+1 행사를 하면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많이 사놓는 행위가 비일비재한 곳이다.
특히 '이거 사서 맛있게 해 먹야지'라는 생각으로 구매한 각종 채소와 과일, 두부 같은 것은 가끔 나를 곤혹스럽게 한다. 일단 냉장고에 들어가 버리면 곧잘 잊히는 식재료들. 첫 만남의 싱그러움을 잃은 먹거리들에 표정이 있다면 나는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숙연한 마음에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할 것이다.
그런 날에는 며칠 내로 냉장고 털기를 시작할 수밖에 없다. 주도적으로 산 먹거리가 못 먹게 되기 전에 부지런히 비워야만 하는, 이른바 '냉털 프로젝트'다.
주말에 일어나 냉장고를 뒤적이면 ‘집에 먹을 게 없어서’라는 지난 말들이 무색하게도 쓸만한 먹거리들이 많이 보인다. 오늘은 야채박스를 비우기로 작정하고 묵혀 놓은 사과 1개, 조금 시든 샐러드 채소, 언제 샀는지 모를 스트링 치즈를 꺼내어 샐러드를 만든다.
1. 사과 1개를 채 썰고, 샐러드용 채소는 먹기 좋게 잘라 그릇에 담는다.
2. 스트링치즈를 썰어 적당히 올린다.
3. 유자청(혹은 유자 올리고당) 1큰술, 레몬즙 1~2큰술, 올리브오일 2큰술, 소금과 후추를 약간 넣어 드레싱을 만들어 샐러드에 뿌린다.
감기 기운에 시달리던 입맛을 돋우는 아삭하고 상큼한 사과 샐러드. 과일과 채소의 건강한 맛도 맛이지만, 냉장고 한편을 비웠다는 후련함이 주말 아침을 신선하게 환기시켜 준다.
여름의 초입에는 달큼한 맛이 일품인 참외를 사둔다. 껍질을 깎아 먹는 과일은 어쩐지 손이 자주 가지 않는데도 제철과일은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바빠서 먹을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미루고 미루다가 껍질이 쭈그러들기 직전에 야채박스에서 꺼내온 참외. 깨끗이 씻어 길쭉하게 자르니 달콤하고 시원한 향이 솔솔 난다. 한바탕 집안일을 마치고 먹으니 더욱 꿀맛이었던 주말 오후의 간식.
그렇게 냉장고 속 재료들을 털어 김밥도 말고
참, 봄철의 끝물에는 물러가는 딸기를 적당히 썰어 샐러드도 만들었지.
본래 음식을 남기더라도 푸짐히 먹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던 나는 장을 볼 때도 조금 많이, 더 다양하게 사는 습관이 있었다. 음식을 할 때는 부족함 없이 만들고 외식을 할 때는 1.5배를 더 주문하고 싶어 하는 건 여전하지만, 마침내 변한 게 있다면 냉장고를 비우는 기쁨도 함께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근사한 음식이 차려진 레스토랑보다 우리 집 냉장고에 있는 먹거리를 활용해 차려낸 소박한 식탁 앞에서 나는 더 편안하다.
버리기 대신 비우기. 냉장고를 비우는 단순한 기쁨을 통해, 어른다운 어른이 되어 가는 기분을 맛보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