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위한 준비
연말 모임, 직장 생활의 애환을 주제로 이야기가 한창 무르익는 중에 친구가 물었다.
“너는 무슨 고민이 있어?"
회사에서 어떤 고충이 있는지 생각해 보니 그저 좋은 기억뿐이다. 우리 팀의 업무 분장과 업무 지시는 합리적이며 명확하다. 기분에 따라 태도가 달라지거나 친목을 강요하는 사람도 없다. 운이 좋은 편이었다. 그러니 무슨 말을 보탤 수 있겠는가. 다만, 언제부터인가 네모 반듯한 사무실과 정돈된 자리를 떠올릴 때면 뚜렷한 이유도 없이 착잡해지곤 하는데, 아직까지 그 원인을 찾지 못하는 중이었다.
예전부터 나는 좋은 평판을 위해 필요 이상으로 애써 왔다.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하며 유연한 것처럼 굴었고 상사와 동료들을 실망시키지 않으려 노력했다. 친구들에게 기대하는 답을 해 주진 못했지만, 그날의 모임을 계기로 이 불안함이 어디서 오는지 분명히 알게 되었다. 더 나은 사람임을 증명하려다가 내가 아니게 되어 버린 것이다.
애초부터 치열함은 나와 거리가 멀다. 본래의 나는 사회적 평판보다 주변을 돌보면서 느끼는 소소한 즐거움에서 더 많은 기쁨을 얻는 사람이다. 이를 테면 퇴근길 가족과 전화를 할 때나 몇 년째 함께 사는 화초에 물을 줄 때 그리고 종종걸음으로 돌며 차근차근 집안일을 해낼 때가 그렇다. 나를 행복하게 하는 일이란 이렇듯 쉽고 작디작은 것에 지나지 않는데도, 어른의 몫을 해내려다 보면 이 사실을 자주 잊어버린다.
누구나 하나쯤은 행복과 연관된 루틴이 있을 것이다. 내게는 휴일을 맞아 집에서 브런치 카페를 여는 일이 그렇다. 회사생활이 더는 재밌지 않을 무렵부터 카페를 차리는 건 현실을 잊게 하는 즐거운 상상이었다. 그러나 카페를 운영하는 삶은 보이는 것처럼 여유롭지도 자유롭지도 않고, 내 기력과 체질에 적합하지 않은 직업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나서 큰 저항 없이 현실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때 나를 위로한 방법이 카페에서 먹는 것처럼 브런치를 만드는 일이었다. 보기 좋게 차려내는 게 누군가에게는 노동일 수도 있지만 내게는 이 과정이 퍽 즐겁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시판 제품을 적당히 조합한 구성이 대부분이어도, 좋아하는 식기로 오밀조밀 구색을 갖추다 보면 꽤 근사한 차림이 된다. 이런 식탁들을 보면,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았는데도 어여쁘게 자리 잡은 모양이 어쩐지 마음을 뿌듯하고 즐겁게 해 준다. 나는 화려하고 반짝이는 것이나 최신 유행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지만, 대신 꾸준히 선호하는 요소들, 이를 테면 둥근 모서리와 쌀알의 빛깔을 닮은 미색, 투명한 유리와 나뭇결 같은 것들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모습에서 아름다움을 본다. 이렇듯 은은하게 감각되는 감동들을 통해 나다움을 찾아가는 것이다.
잘 살아가다가도 때로는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인생에 의문을 던진다.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논하다 보면 돌고 돌아 다음과 같은 결론에 다다른다. 우리는 '왜 사는가'보다 '어떻게 사는가'를 생각해야 한다고. 톨스토이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때는 언제인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바로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을 위한 좋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삶의 진리를 전했다. 그렇다면 나는 좋은 평가를 받는 사람으로 살기보다 스스로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내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항상 진심을 다할 수 있을 테니까.
회사 일은 여전히 그만두고 싶은 숙제와 같고, 아직도 나는 일찍 일어나야 하는 아침마다 삶이 고달픈 염세주의자가 된다. 그러나 휴일 정오마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커피를 내릴 수 있는 여유가 결국은 내일을 살아가게 하는 것처럼, 행복은 언제나 그랬듯 아주 가까이에 있을 것이다. 오늘도 나는 이 작은 브런치 카페에서 모든 걸 내려두고 더 작은 위안을 얻는다. 맛있는 빵을 데우고 아끼는 그릇을 내어 놓는 한 줌의 낭만. 행복을 위한 준비는 이것으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