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서사하라의 일기

2021.4.10.

by 은혜은

오랜만에 일기장을 폈다가 예전 일기를 읽었다.


2021년 4월 10일의 일기


서사하라.

자고 일어나면 지형이 달라져 있는 곳. 조금만 지나면 발자국이 지워지는 곳. 밤에는 별이 쏟아질 듯이 반짝이는 곳. 내 평생 가장 선명한 오리온자리.

고요한 곳. 어디서 왔을지 모르는 끝없는 모래들. 어디로 갔을지 모를 사막의 사람들. 거리와 깊이가 전혀 가늠이 되지 않는 완전한 어둠. 한없이 부드러운 모래. 한없이 무서워지다가도 또 마음이 편안해지는 곳.

남자친구도 가족도 사실은 별로 생각나지 않는.

내 편안하고 고요한 마음과 경이로운 자연만 생각한 곳.

내가 얼마나 작은지. 또 얼마나 젊은지. 그러나 젊음은 얼마나 짧은지. 모든 게 얼마나 덧없는지. 그렇지만 이 말도 안 되는 풍경을 보고 있는 지금이 얼마나 의미 있는지.

많이 웃고 많이 벅찼던 사막. 오래오래 기억하자 꼭.


그리고 너무너무 행복했던 스페인.

세비야에 푹 빠져버린 여행이었다. 물론 말라가와 바닷가 마을들도 참 예뻤지만!!

네르하의 해변에 누워서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행복하기만 한 시절이 있어도 되는 건지 생각했다.

따뜻한 햇빛. 맑은 바다. 시원한 파도소리. 이런 시절이 인생에 있다는 게 너무 과분한 행복이 아닌가. 이런 시절이 있어도 남들처럼 먹고 살 수 있는 건가. 뭔가 대가를 치러야 할 것만 같은 완벽한 행복. 엄마 아빠에게, 과거의 나에게, 또 미래의 나에게까지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는 스물세 살의 행복한 나.


교환학기 후에는 뭔가 더 원대한 뜻을 가지고 돌아오는 건 줄 알았는데 점점 임용이나 후딱 보자는 쪽으로 마음이 기운다. 여행 좋아! 안정적이고 방학 있는 삶 최고! 아무 생각 없이 내 인생이나 행복하게 살고 싶어!




죽을 둥 살 둥 임용을 보고 2년 7개월 만에 관둘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 그래도 다 '아무 생각 없이 내 인생이나 행복하게 살기' 위한 선택이었으니 이해해 줘라. 방학은 참 좋은 거긴 했다!


어찌어찌 남들처럼 먹고살아지긴 하더라. 미래의 너는 그 시간이 빚이라고 생각 안 한다. 오히려 그 시간 덕분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과분한 행복을 누렸던 때가 있음을 기억하고 그리워하고 다시 맛보려고 하루하루 노력하고 있어.


그러니까 괜한 걱정은 말고 마음껏 더 행복해도 된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터널을 지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