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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갈래 우리의 여름으로

1년 전 호주 여행의 기억 꺼내보기

by 은혜은

출국 전 날. 짐 싸기 왜 이렇게 귀찮은가요... 그리고 왜 이렇게나 안 돌아올 것 같은 느낌인지 모르겠다. 교환학생이나 몽골 일정이 훨씬 길었는데 지금이 더더 오래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계속 뭔가 빠진 기분이고 묘하게 불안하지만 가보자고..!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았던 비행.. 잠도 제대로 못 잤는데 그래서 덕분에 얻은 귀한 장면들이 있었다. 한참 뒤척이다 처음 눈을 떴을 때 창밖에 살면서 본 것 중 가장 많은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비행기가 움직여서인지 자다 깨서 눈이 침침해서인지 모르겠지만 별들이 춤을 추는 것처럼 일렁였다. 뭔가 개연성은 없지만, 세상이 나를 환영하는 느낌이었다. 다들 잠들어서 조용하고 깜깜하던 비행기에서 혼자 창문에 코를 박고 별을 보던 순간이 좋았다.



또다시 한참 뒤척이다 눈을 뜨니 이번에는 해가 뜨고 있었다. 여명이 퍼져오는 것이 정말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프롬의 '그대야'를 들었다. '핑크빛 태양이 창을 두드려- 같이 갈래 우리의 여름으로.' 이번 호주 여행이 이 노래로 기억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이 순간이 있었으니 이번 여행은 할 일을 다 했다는 생각까지도 살짝 스쳤다. 여름으로 향하는 계절의 변화를 떠올리니 남반구에 방문한다는 게 실감 났다. 여름에 오리온자리가 뜨는, 북극성 대신 남십자성이 뜨는 남반구. 오리온자리는 나에게는 왠지 쓸쓸한 고3 시절의 기억의 입혀져 있는데, 사라하의 오리온자리와 홉스골의 오리온자리에 이어 이번 여행의 기억도 덧대어봐야겠다.


여차저차 공항에서 숙소 도착. 바로 오페라하우스로 향했다. 주말 마켓을 지나 내리막길을 걸어가니 항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뭔가 비현실적이었다. 약간 칸의 해변 같았다. 눈으로 보고 있는데도 실제가 아닌 것 같은 느낌. 시드니의 상징 같은 건물이라 그런가. 예매해 놓은 티켓을 찾아 오페라하우스에 들어갔다. 가장 큰 홀에서 진행되는 공연이 없어서 아쉬웠지만, 나름대로 멋진 공연이었다. 아는 곡은 많이 없었지만 싱어롱 타임도 즐겼고, 건물 내부에 들어가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언제 또 오페라하우스에서 공연을 보겠어. 그리고 오페라바에서 진토닉을 한 잔 마시며 노을을 기다렸다. 옆자리의 여행객과 서로 사진을 찍어주며 대화도 조금 나눴다. 10년 전에도 시드니에 왔었고, 11년 전에는 한국에도 가보셨다기에 서울 부산 정도 다녀보셨을까 했더니 두 도시는 물론이고 제주도랑 남이섬까지.. 가보셨다는 프로여행러이셨다.. 노을이 핑크빛으로 예쁘게 지는 순간은 참 찰나였는데 앞 뒤의 풍경까지 하나라고 생각하고 여유 있게 즐길 수 있어서 좋았다.



간단한 간식거리를 장 봐서 들어왔다. 컵라면 종류가 다양하지 않아 진라면 '순한 맛'을 먹는 치욕을 겪었다. 숙소 옥상 뷰가 정말 너무 멋져서 오래오래 있고 싶었는데 엄청난.... 여러모로 엄청난 바선생.. 들을 발견하고 기겁해서 들어와 침대에 박혀 일기를 쓰고 있다. 하 이왕 나간 거 좀 더 늦게 발견할걸.... 숙소를 먼저 쓰고 있던 한국인 여자분께 혹시 방 안에서는 바선생.. 이 나온 적 없는지 여쭤봤다. 옥상에서 발견하셨냐고, 자기도 얼마 전에 보고 정말 놀랐다며, 첫날에 발견한 게 좋은 건지 안 좋은 건지 모르겠다고 심심한 유감을 표하셨다. 다행스럽게도... 방 안에서 마주친 적은 없었는데, 없다는 믿음으로 지내야지 어쩌겠냐며 웃으셨다. 맞는 말이다. 없다고 믿는 수 밖에는 딱히 방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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