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랑주리와 지베르니
Day 16
아침 비를 뚫고 오랑주리에 갔다. 가는 길 지하철에서 길거리 공연을 봤는데 정말 멋졌다. 절로 지갑이 열렸다. 오랑주리는 가는 길 마저 좋구나. 오랑주리! 모네의 수련 연작이 360도로 걸려 있는 방이 있다는 말에 꽂혀버렸던 미술관이다. 한껏 기대하며 들어갔는데도 그 높은 기대를 완전완전 충족해 버렸다... 너무 예뻤다 진짜. 자연광이 그림의 조건이었다던 모네의 혜안에 감탄했다. 두 번째 방은 심지어 첫 번째 방 보다 더 컸다. 정말 말도 안 돼... 다른 데서는 크게 사진 욕심이 안 났는데 이 작품 앞에서는 꼭 예쁜 사진을 찍고 싶어서 가방까지 동생한테 주고 사진을 찍었다. 이거 밥 먹을 때도 안 빼는 가방이란 걸 모네 아저씨가 아실까....
그림 앞에 가만히 앉아서 노래를 들었다. 폴킴의 내 사랑, 어반자카파의 봄을 그리다, 우효의 청춘, 잔잔한 노래들이 참 잘 어울렸다. 하루 종일 이러고 있어도 좋을 것 같았다. 언젠가 좋은 사람과 여기에 앉아서 같이 노래를 듣고 하루 종일 속닥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지하도 가볍게 둘러봤다. 오랑주리는 생각보다 더 작았다. 피카소 그림은 사실 내 취향이 아니었고.. 모네의 그림이 제일 예뻤고 르누아르도 좋았다. 인상파 최고. 다시 지상으로 올라와서 수련을 한참 더 보다가 나왔다. 루브르는 그 규모에 내가 압도되는 느낌이었는데 오랑주리는 즐길 수 있는 수준이었던 것 같다. 그냥 수련이 다 해 드심. 최고다 최고!!
미술관을 나와서 앞으로 이어져 있는 샹젤리제 거리를 걸었다. 샹젤리제에 대해서 아는 거라고는 ‘오~샹젤리제~’하는 노래뿐이어서 막연히 아기자기한 예술 거리일 거라고 상상했는데 이건 뭐 그냥 강남이었다. 사람이 너무 많다. 아무것도 안 사리라 다짐했는데 어느새 내 손엔 쇼핑봉투 세 개... 그래도 전부 마음에 든다! 캐리어에 다 들어갈 것인가가 유일한 걱정.
집에 오면서 샹젤리제 거리의 집시들을 경찰이 단속하는 모습을 봤다. 구걸하는 사람을 밀치고 동전을 받던 종이컵을 빼앗아 동전을 길바닥에 부어버렸다. 거주민과 여행객의 입장에서 집시들은 귀찮고 무서운 존재지만 그들도 엄연히 사회적 약자이지 않나. 저렇게 단속하는 게 맞는 건지. 뭔가 마음이 복잡했다.
집에 도착해서 저녁을 간단히 먹고는 학점교류를 갈지 말지 결정하려고 했는데 강의계획서가 거의 안 올라와 있어서 화가 났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 신입생환영회 때 쓸 학회 소개 PPT를 만들었다. 나는 비행기로 10시간 넘게 걸리는 곳에 와 있는데 한국에서는 계속 내가 아는 그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 새삼스럽게 와닿는다. 근데 내가 18학번 신입생환영회를 가야 한다는 것... 가서 학회 홍보 발표를 해야 한다는 것... 은 왜 이리 와닿지가 않는지......^^
내일 오르세를 보고 나면 프랑스도 안녕이다. 여행이 끝나간다.
일 년 후 교환학생 때 파리에 한 번 더 들릴 일이 있었다. 짧은 일정이었지만 오랑주리 방문을 끼워 넣었다. 수련을 다시 보고 싶었다. 모네가 사랑한 지베르니에도 방문했다. 정원의 꽃들이 빽빽하면서도 답답하지는 않게 잘 어우러져 있는 모습이 정말 아름다웠다. 사진으로는 담기지 않는 미묘한 색감까지도 작품 속에 담아낸 모네에 대한 경외심을 느낄 수 있는 장소였다. 모네의 정원뿐 아니라 마을 전체가 알록달록 하니 예뻤다. 담벼락마다 꽃들이 주렁주렁 피어있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마음이 말랑말랑해지는 곳이었다.
고민하던 학점교류는 결국 안 갔다. 뙤약볕을 20분간 걸어 옆 학교까지 수업 하나를 들으러 갈 자신이 도무지 없었다. 지금 생각하니 그래도 새로운 경험이었을 텐데 싶어 아쉬운 마음이 반, 현명한 선택이었다는 마음이 반이다. 선택은 여전히 어렵구나. 신입생환영회에서의 발표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겨우 해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이제는 18학번도 대부분 학교에 없다. 시간이 가는 속도가 다시 한번 놀랍다. 오늘 친구들과 연락하다 다시 대학생이 되고 싶다는 얘기를 여러 번 했다. 직업을 가지면 안정을 찾을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다. 여전히 불안정한 상태로 방황 중이다. 내가 나를 먹여 살려야 한다는 것, 개인적으로 어떤 상황이든 간에 어김없이 출근을 해야 한다는 것이 참 어렵다.
요즘은 커다란 사건이 없어도 마음이 힘들다. 업(業)에 정이 떨어져서 이런 건지 단순히 더위를 먹어서 기운이 쳐지는 건지 모르겠다. 우연히 본 플라워클래스의 주제가 '명화'였다. 모네의 작품을 모티브 삼아 비슷한 색감의 꽃꽂이와 꽃다발 작업을 하는 수업이었다. 오랑주리와 지베르니에서 느꼈던 평화로움이 떠올랐다. 힘든 일상에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마음을 둘 곳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수강료의 압박을 애써 흐린 눈으로 무시하며 신청해 버렸다. 화요일 퇴근 후에 수업을 듣고 있다. 꽃을 만질 때는 다른 생각이 없어지고 꽃에만 집중할 수 있어서 좋다. 꽃 이름을 하나하나 알게 되는 것도 즐겁다. 꽃을 다루는 일을 하면 어떨까, 하다가 일이 되어도 계속 좋아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멈칫한다. 세상에는 자기가 하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아 보인다. 생기 가득한 눈빛으로 자신의 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 열정이 너무 반짝반짝해서 질투가 난다. 나는 어떤 일을 하기 전부터도 그 일을 하며 겪을 수 있는 가장 힘든 점을 떠올리며 마음이 식는데. 현업에서 부딪치면서도 식지 않는 애정이란 어떤 것일까 궁금하다. 모두가 열정과 야망을 가지고 살 필요는 없지, 잔잔하게 가늘고 길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는 거지, 하다가도 나도 저렇게 반짝반짝 빛나는 마음으로 말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