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15
아침부터 부랴부랴 겨우 시간을 맞춰 기차를 탔다. 두 시간 반 내내 자고 콜마르에 도착했다. 사실 파리 근교라기에는 좀 멀지만 따로 숙박을 잡기에는 애매하고 그렇다고 포기하기는 아쉬워서 조금 무리해서 다녀오려고 했다.
콜마르 역 근처는 다른 프랑스 도시랑 별 다를 바 없어서 조금 실망스러울 뻔했는데, 관광안내소에서 지도를 챙겨 구시가지로 들어가니 정말 어디선가 소피가 하울을 부르며 튀어나올 것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점심 먹은 가게가 생각보다 맛이 없고 비싸서 살짝 가라앉았던 기분이 구시가지를 걸으며 인생의 회전목마를 듣자 정말 가벼워졌다.
천 년이 넘었다는 성당도 멋있었다. 다른 도시에서 본 것들보다 훨씬 소박했지만 뭐랄까 듬직한 느낌이 있었다. 다른 성당들에서는 안 밝혔던 초도 하나 봉헌했다. 다른 곳보다 초 값이 저렴하기도 했고, 초 봉헌대 앞에 적힌 글이 마음에 들어서다. 마케팅은 이렇게 해야지. 아 물론 사람이 적어서 마케팅이 절실한 거 일수도 있지만.....
그리고는 카페인이 떨어져서 카페에 앉았다. 오늘 너무 일찍 일어나긴 했어. 카페인을 충전하고서는 계속 콜마르를 걸었다. 비가 오다 말 다를 반복했지만 걸어 다닐만한 수준이었다. 빗 속에서도 콜마르는 예뻤다. 묘하게 색이 바랜 알록달록한 건물들이 주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었다. 아 그런데 콜마르 시내에 흐르는 강에 카메라 렌즈캡을 빠트렸다.. 안녕 내 캐논 렌즈캡.......
다섯 시쯤 되니 이 작은 도시를 두 바퀴는 돈 것 같았는데 기차는 일곱 시 사십 분이고 식당들은 죄다 일곱 시부터 문을 열었다. 어휴. 계속 거닐다가 슬슬 추워질 때쯤 역 근처에서 간단히 저녁을 해결했다. 큰 피자 한 조각일 줄 알고 ‘좀 비싸네’ 생각하면서 주문한 것이 사실 한 판... 이어서 반 판씩 먹고 그대로 한 판을 남겨서 가져왔다. 내일 아침에 먹어야지. 다시 기차를 타고 돌아오는 창 밖에는 불빛이 하나도 없었다. 밤 아홉 시밖에 안 됐는데, 서울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다. 내일은 기대하던 오랑주리 미술관을 간다. 수련을 볼 테야!
음악으로 기억되는 도시들이 있다. '인생의 회전목마'를 들으면 떠오르는 콜마르도 그중 하나다. 클래식을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콜마르에 가기 전 이 노래를 잊지 않고 챙겨 다운로드하였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 속 소피가 사는 마을의 모티브가 된 곳에서 메인 테마곡을 듣는 낭만을 놓칠 수 없었다. 전날 루브르 관람 일정이 생각보다 체력적으로 고돼서 피곤한 상황이었는데, 콜마르의 풍경 속에서 인생의 회전목마를 듣자 발걸음이 마법처럼 가뿐해졌다. 지금도 랜덤 재생 중에 인생의 회전목마가 들리면 콜마르의 풍경이 떠오른다.
콜마르 강에 렌즈캡을 똑 떨어트린 후로는 렌즈 보호를 위해 양말을 씌워 다녔다. 렌즈캡 하나 사자고 발품을 팔거나 배송비를 내기가 싫어서 2019년도에 카메라 렌즈가 망가져서 용산 전자상가에 갈 때까지 그대로 다녔으니 대략 일 년 반 정도를 양말로 캡을 대신하며 살아간 셈이다. (이제 그래도 제대로 된 렌즈캡은 있는) 그 카메라는 여기저기 헐거워지고 틀어지고 뜯어진 채로 아직도 현역이다. 주인 잘못 만나 고생하는 카메라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전하며... 15일 차 일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