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13
파리를 벗어나 베르사유로 간 날. 와... 유럽 와서 본 모든 건축물 중에 제일 화려한 것 같았다. 하긴 지금까지 본 건축물은 성당이나 수도원 쪽이어서 그런 걸지도? 아무튼 진짜 어마어마했는데 이상하게 별 감흥은 없었다. 그런데 메인 궁전보다 작은 공주들의 아파트망에 가서 오디오 가이드를 듣다가 뜬금없이 눈물이 찔끔 났다. 궁중의 예법이 힘겨워 따로 떨어진 자신들만의 성을 그렇게나 아꼈으면서도 프랑스 왕실의 사람인 것에 굉장한 자부심을 가졌다고 한다. 또 한 방에는 수도원에 교육 보내서 10년간 보지 못한 공주들을 그렸다는 초상화가 있었다. 예법은 뭐고 교육은 또 뭔지.
궁궐만 보고 아직 미친 듯이 넓은 정원이 남았는데 너무너무 힘들었다.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았다. 아니 어지간히 넓어야 정원이지 이건 그냥 숲이잖아... 정원은 반의반도 못 본 것 같다... 베르사유 궁전 안을 도는 작은 열차 탄 거 처음에는 돈 아까웠는데 지치고 힘드니 열차 타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차를 타고 대운하가 있는 지점으로 이동했다. 이 정도 규모의 운하를 만들 생각을 한 것도 놀라운데 실제로 구현해 낸 건 정말이지 대단했다. 그 시대에는 상상하기도 어려웠을 것 같은 규모였다. 끝이 안보였다. 궁전 쪽으로 한참을 걸어가니 운하 끝이 겨우 보였다. 분수의 조각과 운하가 어우러져 정말 장관이었다. 이 멋진 풍경을 매일 보면 행복하겠다 싶다가도 그래도 왕족은 힘들겠다는 생각을 했다. 개인적으로 정치와 예법에 묶인 삶은 자신이 없다. 기대 수명이 40세도 안 되는 시대에 뭘 바라고 이런 어마어마한 걸 지으려고 시작했는지 의문이 들었다. 부와 권력 뭘까.. 가져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다.
너무너무 지친 몸을 이끌고 파리로 돌아가는 171번 버스를 탔다. 노래를 듣고 창밖 풍경을 보면서 가는데 자꾸만 포르토의 500번 버스가 생각났다. 분명 지금 여기도 참 좋은 곳인데. 파리씩이나 와서 포르토를 떠올리는 내가 참 과거에 메여 사는 사람이구나 싶었다. 미련 덩어리다 아주. 그냥 지금을 즐기는 건 성격에 안 맞냐? 순간 내가 좀 멍청하고 한심하게 느껴져서 헛웃음이 나면서도 계속 포르토의 500번 버스가 그리웠다.
저녁 먹으러 가려던 식당이 앞으로 일주일간 예약이 꽉 차있다고 해서 한껏 아쉬운 마음으로 근처 한식당을 찾았다. 한국에서 순두부찌개가 2만 원이라면 기겁을 했겠지만 여기서는 나름 합리적인 가격이다... 파리에서 순두부찌개를 먹을 수 있다니 세상 정말 좋아졌다. 2주 만에 한식을 먹으니 속이 아주 든든했고 원래 가려던 식당을 못 간 아쉬움이 조금 덜어졌다.
루브르에 가기 전에 꼭 봐야 한다더니 뭔가 별게 없던 EBS의 다큐를 한 편 보면서 마트에서 사 온 와인과 치즈를 먹었다. 고다 치즈 정말 맛있는데 이만큼이 3천 원 정도인 게 믿기지 않는다. 프랑스 와서 제일 좋은 건 와인이랑 치즈가 싸다는 점인 듯. 와인 홀짝대다가 반 병이나 마셔버렸다. 내일 루브르 가려면 일찍 일어나야 하는데 살짝 취한다. 얼른 자야지.
이제는 한국에서 순두부찌개가 2만 원이어도 (물론 비싸다고 욕하긴 하겠지만) 기겁까지는 안 할 만큼 물가가 올랐다. 호주에서 신전떡볶이랑 설빙도 먹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예전의 기록을 들춰보다 보면 시간 가는 속도가 어질어질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지만 그래도 그 나름의 즐거움이 있다. 3천 원 치에 한 통 가득하던 고다 치즈 블록을 다시 먹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