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17
오르세는 정말 정말 예뻤다. 들어서자마자 조각상들이 많았는데, 니케 이후로 조각상에 별 감흥이 없다. 눈이 높아져서 큰일이다.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이 많아서 좋았다. 모네는 정말 너무 최고다. 인상주의의 다른 화가들 그림도 전부 아름답긴 한데, 모네 그림은 진짜 어디서 빛이 들어오는 것처럼 화사하다. 빛의 마술사라는 수식어는 누가 붙인 건지 정말 찰떡이다. 교과서에서 보던 그... 뭐냐... 똑같은 성당 네 가지 다른 날에 그린 거.... 아무튼 그것도 봤는데 정말 신났었다.
그리고 또 감탄스러웠던 것은 반 고흐의 그림이다. 저렇게 투박한 선으로 어떻게 이런 섬세한 색감과 편안한 느낌을 만들어 낸 건지. ‘고흐는 대표작 아니어도 다 예쁘네~’하면서 보다가 짚더미에 농부 부부가 누워있는 그림을 보고는 심장이 두근두근 뛰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아니 그 그림 진짜 최고였다... 고흐의 초상화도 참 멋졌지만 나는 이 그림이 더 좋았다. 이름을 찾아보니 밀레 그림의 모작인 ‘오후의 휴식’이라고 한다. 오르세를 다 돌고 마지막으로 다시 고흐 전시실로 가서 그 그림을 봤다. 너무 평화로워서 약간 눈물 날 뻔했다. 총 관람시간은 4시간 정도였는데 이 정도 규모가 딱 적당한 것 같다. 루브르는 너무 컸고 오랑주리는 수련의 강한 임팩트를 제외하면 조금 작은 느낌이었으니까.
그리고 이제는 정말 프랑스와 안녕할 시간이다. 숙소를 청소하고 대충 저녁을 먹은 후에 기차를 타러 왔다. 야간기차는 처음인데 침대칸이 정말 신기했다. 그런데 종점이 아니라 중간에 내려야 하는 거였고, 안내 방송이 불어로만 나와서 걱정이 많이 됐다. 안전? 해 보이는 여자 두 분과 같은 방을 쓰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캐리어의 안녕이 조금 불안하기도 했다. 다행히 캐리어는 무사했고.. 침대칸은 생각보다 편해서 나름 꿀잠도 잤다. 지금은 환승역인 페리페뇽에 무사히 내려서 아침으로 샐러드까지 야무지게 사 먹은 후에 일기를 쓰고 있다. 조금 전에 전광판에 우리가 탈 기차 번호가 떴다. 두 시간 후면 바르셀로나다. Hola, Spain!
Day 18
페리페뇽에서 바르셀로나 가는 기차 안. 무려 일등석이다 자본 최고! 달리고 달려 바르셀로나 도착.. 도착하자마자 후덥지근했다. 파리에선 너무 소중했던 외투가 순식간에 짐이 되어버렸다. 17도라니 실화인가..? 행복하다. 숙소는 냉장고가 없었지만 깔끔하고 편안했다. 위치가 참 좋다. 보케리아 시장 5분 거리!! 짐 풀고 씻고 주변 구경을 나갔다. 시장은 내 생각보다 크고 먹을 게 많았다. 과일주스랑 핫도그를 먹었는데 둘 다 맛있었다.
그리고 지도에 나온 바닷가 쪽을 향해 무작정 걸었다. 날씨가 좋으니 거리고 하늘이고 다 예뻐 보였다. 10분쯤 걸으니 콜럼버스 동상과 함께 항구가 펼쳐졌다. 이야 콜럼버스 이 동네에서는 동상까지 세우는 위인이라니.... 우리나라에선 그냥 달걀인데. 바닷가에는 엄청 큰 쇼핑센터가 있었고 고심 끝에 반바지를 사버렸다... 후... 이제 제발 그만 사.... 동생은 계속 쇼핑몰 구경을 한다길래 나는 바닷가에 앉아있겠다고 했다. 노을이 점점 짙어지는 게 장관이었는데 포르투나 호카곶보다 훨씬 잔잔하고 부드러운 느낌이었다. 대신 여기는 새들이 난리였다. 비닐봉지 비슷한 것만 꺼내 들어도 모여들어 깍깍대는 걸 보니 좀 무서웠다...
해가 지고, 후덥지근하던 날씨가 슬슬 쌀쌀해질 때쯤 동생이 쇼핑을 끝냈다. 저녁으로 식당의 야외 자리에서 빠에야와 샹그리아를 먹었다. 빠에야는 좀 짰다... 다음부턴 꼭 소금 빼고 먹어야지. 샹그리아는 맛있긴 한데 약간 밍밍한 거 좋아하는 내 입맛에는 신트라에서 먹었던 게 제일 맛있었던 것 같다. 아 포르투갈 가고 싶어..... 돌아오는 길에 호텔 근처 슈퍼를 들러 문 닫는 시간을 여쭤보니 24시간이라고 한다. 와우. 나 유럽 와서 이런 곳 처음 봐. 스페인 대박적.. 씻고 다시 나가서 감동의 24시간 슈퍼에서 맥주를 사 왔다. 스페인에선 스페인 맥주를 마셔줘야지. 처음 마셔보는 건데 보리 맛이 진하게 나고 고소하다. 내일은 가우디 투어 날이다. 투어는 또 어떨지 조금 기대되기도, 걱정되기도 하지만 어떻게 되든 다 인생의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해야지 다른 방법이 없어요~
스물두 살에는 야간 기차를 탈 체력이 있었구나.. 청춘이네.... 하다가 생각해 보니 지난겨울 호주에 갔을 때도 야간 기차를 탔다. 아직 청춘인가 봐 나. 고등학생 때에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는 것이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다. 긴긴 날을 달려 바이칼 호수를 만나고 모스크바에 도착해서 시작되는 유럽 여행이라니, 낭만적이지 않은가. 이 낭만은 언제인지도 모르게 소리소문 없이 버킷리스트에서 삭제 됐다. 유럽 여행? 그냥 비행기 타고 가고 싶다. 이왕이면 비즈니스로. 기차 여행은 3시간이 한계다. 일주일 내내 달리는 기차에서 다른 사람들과 부대끼는 일은 생각만 해도 피곤하고 지친다. 어느 순간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마음속에서 사라진 걸 깨닫자 어른들이 '젊었을 때 열심히 놀아야 한다. 다양한 경험을 해야 한다' 했던 이유가 조금은 이해 됐다. 나이가 들면 어렸을 적 꿈꿨던 걸 할 수 없는 게 아니라, 하고 싶지 않아 질 수 있는 거였다. 체력이 줄어들든, 다른 더 원하는 것이 생기든 간에 예전의 마음과는 달라져버리는 것이다. 원하지 않아서 안 하면 아무 문제없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한 때 간절히 꿈꿨던 것이 지금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 게 세월에 낡은 나를 반영하는 것 같아 서글프다. 비슷하게 마음에서 흐려져가고 있는 것이 우유니 사막 방문이다. 고등학생 때 싫어하는 수학선생님이 우유니 사막 다녀온 얘기를 하셔서 너무 부럽고 짜증 나는 마음에 운 적이(;;) 있을 정도로 우유니 사막을 가고 싶어 했던 나였다. 지금도 여전히 우유니 사막을 경험해보고 싶지만 남미까지 가는 항공편 시간과 남미 여행의 어려움을 떠올리며 점점 마음이 작아지고 있다. 몇 년만 더 나이를 먹으면 우유니 사막도 시베리아 횡단열차처럼 내 마음속에서 사라질 것 같아서 약간은 초조한 마음까지 든다. 언제든 그때가 내 인생의 가장 젊은 날!이라고 생각하며 떠날 수 있는 사람이고 싶은데 그러기엔 너무 지친 심신인 것 같다. 그래도 아직 야간열차를 탈 수 있는 청춘임을 의식적으로 기억하며... 기운을 내 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