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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혜 Eunhye Jeong Nov 03. 2020

전위 음악은 전복을 추구하나?

실험/전위음악은 전복顚覆이자 혁명일까?


헤겔의 변증법적인 시각으로 패러다임의 전환을 예술의 발전으로 보며 해석을 한다면 그렇게 여겨질지는 모르겠다. 쇤베르크는 12 음계라는 작곡 체계를 세워 기존의 조성 음악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고, 스스로 새로운 음악적 바탕을 마련했다고 획기적이라 여겼다고 한다.


무조의 현대음악을 좋아하는 일인이지만, 조성 음악과의 우열을 가릴 수는 없다. 평균율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여러 화성적 어법으로 인하여 작곡가들이 더욱 창의적인 다양한 음악을 만들어내는 데에 한계를 느꼈기에 이러한 새로운 음악의 어법이 탄생한 것이기는 하지만, 조성 음악의 안정감과 그 자체의 아름다움이 어찌 무조음악에 전복당했다고 하겠는가!


위는 클래식, 즉 유럽의 전통음악의 흐름을 중심의 이야기다. 20세기 초 미국 흑인의 비교적 젊은 전통음악인 재즈는 유럽과 백인 중심의 문화에서는 그 자체가 아방가르드였다. (백인 남성) 학자들은 재즈를 음악 취급도 하지 않았다. 핍박의 대상임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유럽인들과 미국 클래식 작곡가들에게 탈출구이자 창작의 영감을 제공해주었다. 자연스럽게 자라난 문화 예술의 존재 자체가 전위적이라는 것은 순전히 그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있었다. 물론 저항정신을 다양한 방식으로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담은 음악가들도 있었다. 존 콜트레인, 마일스 데이비스부터 AACM의 수장인 무할 리처드 아브라함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음악활동이 정치적, 문화적, 역사적, 인종적인 문제와 결코 무관하지 않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정신의 불을 밝혀 음악을 통해 끊임없이 자기 확인과 자기 선언을 했다.


그것이 일으킨 사회적 반향, 그것이 혁명적일 수는 있겠다. 그러나 기존의 질서를 뒤집고 완전히 새로운 질서를 세우고자 하는 다소 비인간적이라고 느껴지는 전복의 의미는 아닌 것 같다. 이미 불균형을 이룬 질서가 균형을 찾아가는 것은 전복이 아니고, 설사 힘의 무게중심이 완전히 뒤바뀌었을 지라도 ‘우린’ 이분법적으로 기존의 ‘정’을 ‘반’하여 새로운 합을 이루어냈다고 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주로 세상에 내어놓는 음악은 그 겉모양 새가 전위적이다. 그런데 나는 기존 질서를 엎을 마음으로, 어떠한 ‘주의ism’이라는 깃발을 내세워서 창작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사실 많은 동료들이 그렇다. 생각해보니 ism을 내세우는 사조는 오늘날엔 촌스럽기까지 하다. 음악가들의 창작은 기본적으로 ‘조화’를 찾아가는 것이다. 그 조화라는 것이 정량화된 평균율 안에서 찾는 화성중심의 조화일 수도 있다. 나의 경우는, 한국 전통음악 정신과 피아노라는 악기가 내어놓을 수 있는 음악의 다양한 모습, 심상화되어 존재하는 나의 내면 속의 의미와 소리로 표현되는 음악, 사회의 과거 현재 미래의 흐름 속에서 이뤄낼 수 있는 ‘조화’를 찾으면서 음악을 한다. 물론 극복하고자 하는 ‘기존 질서’는 있다. 예컨대 때로 한 음을 매우 세게 내려치는 이유는 한 음 속 많은 음을 증폭된 진동으로 울려서 자기 구획의 기본음을 깨끗하게 내어 화성의 탑을 쌓는 그런 방식의 음악으로 흐르지 않게 그 방향을 전환하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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