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fictions

토끼 이야기

fiction series

by 정은혜 Eunhye Jeong

별것 아닐 것 같지만 이야기가 이야기가 되려면 그 이야기가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나아가기 위한 계기가 필요하다. 그래서 오랫동안 산속에서 뛰놀며 좌충우돌하며 그냥저냥 살던 한 토끼는 배탈이 나버렸다. 작은 몸, 갈색 털은 빗속에서도 그저 뽀송했지만, 방정스럽게 뛰어다닌 덕에 돌부리에 나무뿌리에 걸려 생긴 상처가 많다. 그런데 그마저도 능청스럽게 보인다. 아파도 아픈 줄도 모르고 쏘다니며 흙과 열매, 다람쥐들을 벗하던 이 토끼를 멈춘 것이 바로 그 배탈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별일 없이 토끼다운 생을 그냥저냥 계절에 맞춰 살다 그냥저냥 새끼들도 낳고 그냥저냥 죽었을 것이다.

배를 움켜쥐고 떼굴떼굴, 이리 떼굴, 저리 떼굴 하다가 뿌연 흙먼지를 일으키며 쓸려내려 가다 멈춘 곳은 다행히도 의사 토끼굴 앞이었다. 쿵 하는 굉음에 깜짝 놀라 뛰쳐나온 토끼 의사는 이상하게도 앞치마를 두르고 코걸이 안경을 쓰고 있었다. 날카로운 눈빛은 뭐든 의심하고 꼼꼼하게 따지는 성격을 보여주는 듯했지만 헝클어진 머리칼과 그 행색이 안 어울리는 듯 어울리는 콜라주처럼 묘하면서도 맘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흙먼지가 가라앉자 손을 휘저으며 시야를 겨우 확보하려던 의사 토끼가 둥글게 몸을 말고 웅크리고 있는 토끼에게 다가갔다.

괜찮은가요?

눈을 겨우 뜨고 바라본 의사 토끼의 모습에 웃음이 터져 나왔지만 여러 번 굴러 욱신욱신한 몸의 감각이 금세 웃음을 틀어막았다. 아뿔싸. 너무 큰 충격을 받았는지 보통의 토끼똥과 달리 크고 묵직한 똥을 싸고 말았다. 부끄러운 맘에 안 그래도 붉은 눈이 더 빨개졌다. 고개를 떨구고는,

괜찮.... 아니 사실 안 괜찮아요.... 배..배탈이나서 그만...

의사 토끼가 곰 똥 같은 토끼똥을 발견하고 흠칫 놀라더니 이내 정색을 하고는 꽃무늬 프린트 앞치마에 있는 주머니에서 수술 장갑과 핀셋을 꺼냈다. 그리곤 그 똥으로 다가가서 한참을 앉아 뒤적였다. 차마 그 모습을 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있던 토끼가 조심스럽게 입을 떼었다.

의사 선생님 같으신데..

네 여기 병원입니다

라고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 순간 환희에 찬 표정을 지으며 핀셋으로 건져 올린 무언가를 들고 소리쳤다.

이것 좀 봐요!

그게 뭔가요?

아, 이게 원인이었어. 잘 됐어요. 나를 찾아오길 참 잘했어, 자네. 운 좋은 친구네.

한 건 했다는 듯 시원하게 장갑을 벗고는, 어느새 말까지 시원하게 놓고 토끼에게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뒷짐을 지고 토끼굴로 재빠른 걸음으로 들어가서 달달하고 뜨거운 차를 컵에 따라서 토끼에게 건넸다. 영문도 모른 채 배를 여전히 움켜쥐며 따라온 토끼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찻잔을 받아 들었다.

자네, 배가 아프다 그랬지?



자네가 그 산딸기를 먹어서 그런 거라네.

산딸기는 제철이 되면 자주 먹는데요, 제가 썩은걸 먹었나 봐요.

아니, 그게 아니야. 자, 이것 좀 봐.

토끼는 눈살을 찌푸리며 코를 틀어막고 곁눈질로 의사 토끼가 내미는 그것을 보았다. 산딸기 씨앗의 모양 인제, 보통의 것보다 10배는 큰 씨들이 뭉쳐져 있었다.

저는 분명히 이렇게 큰 씨앗을 지닌 딸기를 먹은 기억이 없는데요.

토끼는 머리를 긁적였다. 의사 토끼는 그 말을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말을 이어갔다.

일단 이 차와 함께 이 풀 한 움큼을 먹으면 1주일 정도는 배가 아프지 않을 것이네. 이 풀로 말할 것 같으면 우리 집안에서 대대로 이어져오는 방식으로 키워온 산약초 중 하나인데 새벽이슬을 머금을 때에 똑 따서 솥뚜껑에 찻잎처럼 덖어야 최상의… 아니, 아무튼, 어서 들게.

토끼는 동그랗게 말린 풀을 오물오물 씹어먹으면서 뜨끈한 차를 함께 마시기 시작했다.

약초가 토끼의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지켜보면서 의사 토끼는,

자, 이걸 먹고, 어서 길을 떠나게. 이곳에서부터 계곡 물줄기를 거슬러 고개를 하나 넘은 후에 두 번을 더 넘고 한번 더 만나는 그 고개를 넘지 말고 3분의 4 지점 어딘가에 보면 그 옹달샘이 있다네. 그곳에 가서 물을 토끼 손으로 7번 떠먹으면 완쾌할 것이야! 아, 그리고, 내가 이 진료는 무료로 해줄 터이니, 그 옹달샘에 간 김에 이 물통에 샘물을 한가득 담아 가져다주게! 그렇게 할 수 있겠나?

그는 나무로 잘 깎아 만든 손때가 곱게 묻어 윤기가 나는 물병을 들이밀었다. 토끼는 얼떨결에 받아 들고는, 어느덧 편안해진 속에 기분이 좋아져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혹시 모르니 내가 그림지도를 그려주마.

나뭇가지를 먹물에 담갔다 빼고는 나무 섬유질이 거칠게 비치는 닥종이에 삐뚤빼뚤 그림지도를 그렸다. 먹을 서둘러 말리려는 듯 종이를 허공에 여러 차례 흔들더니 눈짓으로 토끼를 불러 종이를 접으라고 했다. 토끼가 지도를 곱게 접는 동안 달그락달그락 소리를 내면서 그가 두른 앞치마와 같은 무늬의 보자기에 당근, 고구마, 약초 풀, 메추리알을 주섬주섬 담아, 길을 떠나는 토끼의 어깨에 묶어 주었다.

지도는 잃어버리지 말고, 혹시 잃어버리더라도 내가 한 말을 잘 기억하게나. 영 길을 잃은 것 같다 싶음 아침에 활발하게 지저귀는 새들에게 길을 물어보게나.

그럼, 선생님께선 그 옹달샘에 가보셨나요?

어, 아니. 그러나 우리 집안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고대 의학책에 있는 내용이네.

종이가 바래다 못해 만지면 즉시 부서져버릴 듯한 책더미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도 깜짝 놀랐지 뭐야. 내 생에 그 산딸기를 보게 될 줄은. 그나저나 자네 똥에 남아있는 저 산딸기 내가 가져도 되겠지?

토끼는 어안이 벙벙해져, 대충 자기 똥을 가져도 된다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아니 지금 나보고 있을지도 없을지도 모를, 그리고 그 긴 시간 동안에 메워져 버렸을지도 모를 옹달샘에 가라는 거야?’ 그런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벌써 가파른 산등성이를 신나게 뛰어올라가고 있었다. 의사 토끼의 토끼굴도 이젠 보이지 않았다. 의사 토끼의 마지막 모습과 말은 확성기를 켠 것처럼 크게 들리며 머릿속에 맴돌았다. 한참을 지나서야 자신이 이미 길을 떠났다는 것을 겨우 알아차렸으니 말이다. 여전히 얼떨떨한 토끼는 결국 옹달샘을 찾아 길을 나서게 된 것이다. 부모님도 친구들도 이야기한 적이 없는 그 미지의 옹달샘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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