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외할머니의 납골당으로 모시고 가다
4년 전 엄마는 무척 아팠다.
뇌경색으로 두 번이나 쓰러졌고, 그때마다 집중치료실에 입원해 반신불수가 되어 두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
보호자는 정해진 시간에만 들어가 면회가 가능했고, 가뜩이나 자존심 강한 엄마는 갑작스레 마비된 손발이 움직이지 않자, 간호사의 도움이 없으면 밥 먹고 양치하고 용변 보는 것도 불가능해진 자신의 변화를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다. 그걸 보는 나도 현실을 인정하기 싫었다.
아프기 전 엄마는 동네에서 애들에게 사자소학을 가르치거나 지역구 탁구대회 3등을 할 정도로 당당하고 활발하게 사셨던 분이었다.
몸의 반이 마비되어 움직이지 않게 되자 예순아홉의 나이에도 중년의 여자’로 보였던 엄마는 급격히 ‘할머니’로 변했고, 굽어진 허리 각도만큼 자존감도 현격히 줄어들었다. 물론 뇌경색으로 얻은 기억력 감퇴도 함께 말이다.
이를 악물고 꾸준히 재활운동에 종이접기 식이요법으로 관리하신 덕인지, 삼 년 후엔 조금 다리를 절뚝이긴 하셔도 걸을 수 있고 손가락이 굽어있긴 해도 어눌한 설거지도 가능해지셨다.
2019년 봄이 되어 모처럼 강원도로 가족 여행을 갔다. 그러다 계획 없이 우연히 들린 외할머니 납골당. 주차장에서 자동차 문을 닫다가 어이없이 중심을 잃은 엄마는 손을 짚고 넘어지는 바람에 그 길로 팔이 골절되었다.
엄마는 ‘외할머니 납골당에 꽃을 안 갖고 빈손으로 와서 그런 것’이라며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대며 황망해하셨고, 또다시 ‘환자 모드’로 돌아갔다. 다시 수발하게 된 가족들에게 미안해하시면서...
뭐가 그리 미안한 건지.. 아픈 건 당신인데...
그리고 일 년이 지나 골절된 엄마의 팔은 어느덧 아물었고, 다리 또한 여전히 절뚝이긴 하지만 짧은 여행도 가능해졌다. 연이은 경험으로 나는 엄마가 언젠가 내 곁을 영원히 떠날지도 모르는 ‘불안감’을 갖게 됐다. 그래서 시간이 주어질 때마다 엄마와 추억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증’이 생겼다.
2020년 5월, 코로나가 창궐하고 회사는 나에게 무급휴가를 주었다. 당뇨에 고혈압 그야말로 ‘코로나 고위험군’인 엄마를 모시고 여행을 떠난다는 소리에 남편은 만류했다. 그러나 엄마는 이번에야말로 “꽃을 가지고” 외할머니 납골당에 가보고 싶다 하셨다. 나는 이기적으로 그냥 딴 데 가서 놀자고 하고 싶었지만, 자신의 엄마를 보러 가고 싶은 엄마의 마음이 느껴져 어쩔 수 없이 운전해 모셔다 드리겠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엄마의 고향 '삼척'으로의 모녀 여행이 시작되었다.
강원도의 표지판이 보이자, 운전하느라 피곤한데 자꾸 엄마는 내게 자기 어린 시절을 얘기했다.
“삼척엔 시멘트 공장이 있었어. 그야말로 공업도시였지. 집을 그럴싸하게 지으려면 시멘트가 필요하잖아. 전국의 부자들이 현금을 가방으로 싸들고 와 시멘트 공장 앞에서 며칠씩 기다리고 있다가, 시멘트 사들고 집에 의기양양하게 돌아갔지”
서울-강릉 시원하게 뚫린 고속도로를 밟으며 운전하는 딸의 피로 따윈 관심 없는 울 엄마는 추억에 잠겨 내가 듣던 말건 상관없이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그 시절 삼척엔 다방도 많았어. 그 부자들에 어디서 기다렸겠어. ㅋ”
깡시골 촌년인지 알았던 울 엄마의 설명에 내 머릿속 삼척은 어느덧 “공업도시”로 바뀌어버렸다. 삼척에서 서울로 유학 간 1호 여중생이었던 엄마. 감자 옥수수 캤던 강원도 삼척의 이미지는 엄마의 두서없는 이야기보따리에 순식간에 달라졌다. 유달리 주산을 잘했던 엄마는 초등학교 때 강릉에까지 주산 경시대회 치르러 가면서 공부에 두각을 나타냈단다. 아들 하나 못 낳고 딸만 셋 키우며 무시당했던 외할머니는 “여자도 배워야 한다”며 감자 옥수수 깨 팔아 둘째 딸이었던 엄마를 서울서 대학 다니던 첫째 딸 있는 데로 중학시절부터 유학 보냈고, 중학교 시험 보던 날 늦잠 잔 큰 이모는 울 엄마를 빵 먹여 보냈는데도 시험에 붙었다며 감격해했다는 일화가 우리 집에 전해졌더랬다. (당시 시험 당일 빵 먹으면 빵점 맞는다고 했다)
그렇게 서울서 유학한 엄마와 큰 이모는 학교를 졸업하고 금의환향 삼척에 돌아왔고, 큰 이모는 보건소에 엄마는 전국에서 제일 큰 'ㄷㅇ 시멘트 회사'에 취직했다. 그 후엔 은행으로 당당히 이직했고 삼척에서 유일하게 '테니스'치는 신여성으로 자리 잡았다. 회상에 잠긴 엄마는 “아마 내가 삼척에서 유일하데 테니스 치는 여자였을 껄!?” 내가 테니스 치면 사람들이 와서 구경하고 그랬어~”
당시에는 시집가면 회사를 그만둬야 한다는-지금으로 말하면 불합리한 근로계약서 조항-에 의해 엄마는 아빠와 결혼하면서 잘 나가는 은행도 그만두었단다. 그리고 우리 셋이 태어났다.
엄마의 독백과도 같은 자랑. 어느덧 차량은 삼척으로 들어섰다. 고향까지 모셔다 드리나 전혀 ‘효녀’ 아닌 딸내미는 오늘도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어찌 된 게, 엄마는 자기 엄마 납골당 이름도 몰라?! 삼척에 납골당이 두 개나 되는데~ 어디가 외할머니 납골당이냐고!!!!?” 삼척 1호 서울 유학 소녀였다던 울 엄마 이제는 자기 엄마 납골당 이름도 못 외우는 자신의 모습에 ‘피식’ 웃어버리는 일흔세 살의 노인네로 변해버렸다.
우여곡절 끝에 찾아간 납골당 앞. 엄마는 또 넘어지는 화를 당하지 않기 위해 조심조심 차에서 내렸다. 트렁크에 고이 모셔놓은 조화를 들고 외할머니 납골당에 도착했다.
외할머니 납골당엔 사진도, 이름도, 꽃도 없어 찾기가 힘들었다. 그저 덩그러니 유골함만 자리 잡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속상한데 엄마도 속상하겠지?!
괜히 오래 있으면 눈물 날 것 같아 화장실 가겠다며 엄마를 납골당에 두고 먼저 밖으로 나왔다.
한참을 있다가 나온 엄마에게 물었다.
“할머니에게 뭐라고 얘기하고 왔어?”
엄마는 머뭇거리다 이렇게 얘기했다.
“열심히 농사지어 딸내미 서울 유학까지 보냈는데, 이렇게밖에 못돼서.. 엄마 미안해...”라 얘기했다고.
그 말을 들은 나는 많이 화가 났다. “엄마는 항상 최선을 다했고, 그 모습이 우리에겐 최고의 모습이었어!! 엄마는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준 지혜로운 사람이었어! 외할머니에게 절대 미안해하지 마. 엄마가 뿌린 씨앗으로 우리가 있는 거잖아!"
엄마는 팔다리 못 움직이고 절뚝거리는 자신의 모습, 늙고 쇠약해진 모습에, 그리고 서울 유학 갔던 소녀의 꿈이 일흔이 넘어 이렇게 바래진 현실에 아무것도 아닌 자신의 모습에 처연해한다.
어떤 말로도 위로해줄 수 없을 것 같아 그냥 내버려 둔다.
세월이, 시간이 흐르는 것을 누가 잡을 수 있으랴?!
내 꿈도 그렇게 바래질 것 같아 겁이 났다.
그리고 일흔셋 엄마의 구부정한 모습이 언젠가는 내가 될 것 같아, 내 마음속에도 슬픔이 스펀지처럼 스며들었다.
'외할머니, 엄마 남은 인생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할머니께서 울 엄마를 지켜주세요.
저도 할머니 참 보고 싶어요.
나를 항상 믿고 지켜주신 할머니, 우리 엄마의 엄마....
할머니가 잠잘 때마다 들려주시던 콩니팥니(콩쥐팥쥐) 이야기가 사무치도록 그립습니다....
다음에 또 올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