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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니스 황 Dec 04. 2022

책의 값

하창수 에세이 "인생"을 읽고

오후의 자연광, 따뜻한 보이차, 천천히 책장을 넘기는 여유, 빈백의 편안함. 그걸로 족한 일요일 오후.


 나에겐 책을 나누는 기준이 하나 있다. 그 책의 가치와 효용을 따지는 기준이랄까, 혹은 그 책을 읽기 잘했다와 그냥 쉬는 게 내 건강에 더 좋을 뻔했다를 나누는 기준이랄까. 책을 읽을 때 공감되는 좋은 문장, 나에게 질문을 던지는 문장, 나를 일깨우는 문장, 혹은 표현이 몹시 아름답거나 신선한 문장은 노란 색연필로( 예전엔 노란 색연필이 안 보이면 가끔 녹색 색연필도 사용했는데, 한 20년이 넘게는 노란색만을 사용하고 있다) 밑줄을 긋는 오래된 습관이 있다. 책을 다 읽고 났을 때 이 노란 표시가 하나도 없는 책은 뭔가 내 시간이 아까운 느낌이 들었고, 책값을 못하는 느낌이 들었다.


별로 재미를  느꼈어도  노란 표시가  문장이  군데라도 있으면 나에게 유익한, 읽을 가치가 있는 책이라고 여겨졌고, 보통 괜찮은 책에서는 2~3 군데 정도의 마음에 드는 문장들을 건질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멋진 작가들의 책에서는 5~6군데 정도를 건질  있으면 뭔가 노다지를 캐내는 기분이 들기도 했고, 그중 최고의 노다지 금광은 5 정도를 완독  성경이다.


 소설가 하창수 선생님의 이번 에세이는 첫 시작부터 노란 색연필이 그어지며 지하철을 타고 술을 마시러 가는 길에도 꼭 색연필을 챙겨 읽게 되는 책이었다. 읽을수록 너무 마음에 와닿는 문장들과 깊은 사유, 겸손과 자기반성을 잃지 않으려는 자세가 나에게 화두를 던지며 중간중간 책장을 멈추게 했다. 그래서 어지간하면 하루 안에 읽을 법한 길지 않은 에세이를 꽤 오랜 시간 몇 번에 나눠 읽었고, 오늘 늦은 오후까지 공복에 보이차를 마시며 남은 부분을 천천히 다 읽었다.
 
 에세이 후반부에 “책의 값”이라는 제목의 내용이 있었다. 책값이 아닌 책의 값. 작가 생활 35년간의 숙성된 경험과 깊은 사유를 단돈 15,000원에 공유받을 수 있다는 건 얼마나 엄청난 혜택인가를 생각했다. 오랜 세월 뛰어난 위인들이나 성공한 분들이 괜히 독서를 강조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다시 한번 들었다. 빠르게 휘리릭 읽어버리기보단 천천히 차를 음미하듯 작가와 대화하듯 하루에 몇 장씩 읽어봐도 좋은 책인 것 같다.
 
 오랜 세월을 잘 지나온 숙성된 보이차를 대접받은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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