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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십일월 Sep 10. 2019

풍요의 시대, 분노하는 사람들

시대적 풍요가 인간의 이성과 삶을 어떻게 마비시키는지.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할머니한테 내 나이 때 고민이 무엇이었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날씨하고 끼니 걱정이 제일이라고 하셨다.

농사를 지으셨던 탓에 날씨가 중요하셨던 모양이다. 또 당시는 지금처럼 풍요롭지가 않았기에 끼니 걱정도 많았고. 티브이도 없고 신문도 안 들어오는 시골이라 매일 농사 짓고, 밥 하고, 빨래하고, 가족들 돌보느라 동네 사람들과는 이야기할 시간도 없었다고 하셨다. 이웃과는 친인척 소식과 농사 이야기가 전부였다고. 약 4-50여 년 전이다.



번지는 분노


몇 년 전부터 사람들이 분노하는 모습이 온라인 기사와 SNS에 공유되기 시작하더니 요새는 그 정도가 심각하다고 느낄 정도로 모든 매체가 분노로 도배되고 있다.

생각해보면 2008년부터 시작된 모바일(스마트폰)과 SNS가 발달은 일반 사람들에게 대중의 알권리를 강화하면서 혁명의 아이콘으로 여겨지기까지 했었다.

그런데 요즘은 모바일과 SNS가 순기능으로 사용되고 있지 않다. 매체가 마치 무기의 양면성(전쟁과 평화)을 띄는 것처럼 오용되고 있다. 사람의 사용 의도가 다분히 들어간 매체. 매체의 악용과 남용에 안타까움을 지울 수가 없다.




분노의 순서


문제를 발견하고, 문제의 원인을 규명하고,

원인이 되는 누군가를 심판대에 세우고.

그러다가 갑자기 주제가 바뀐다.

다른 문제를 발견하고, 새로운 문제의 원인을 찾기 위해 다들 온라인 수사대가 되고, 심판관이 되고.

그러다가 갑자기 연관 없이 큰 사고가 나서

그 사고의 문제가 무엇인지. 원인이 무엇인지, 누구의 잘못인지 규명하고. 심판자들이 되고.

심판하기 위해 분노하는 것처럼 보여진다. 진짜 고민해야 하는 건 그게 아닐텐데 말이다.



분노에 빼앗기는 개인의 삶


개인들이 자기 삶에 집중할 시간을 빼앗기고 있다.다 같이 고민하는 주제가 너무 많아져 버렸다. 모든 사건에 설명이 필요하고 납득을 해야 하고 납득이 되지 않으면 누군가에게 혹은 무엇인가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

우리가 분노하는 이 모든 것이 진짜 문제일까. 사람들의 질투와 두려움을 자극해서 모둔 문제에 분노하게끔 중독시키는 건 아닐까.


이런 세태 속에 우리는 우리 삶에 얼마나 집중하고 있을까. 분노는 우리가 우리의 삶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우리는 자신의 현재와 가족과 친구를 얼마나 둘러보고 있는지. 정작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중심으로 나와 가족 그리고 친구들일 텐데 말이다.




어쩌면 우리는 분노로 인해 우리의 삶을 무책임하게 버려두고 있는지도 모른다. 저의든 타의든.

분노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제도와 정책의 파수꾼이 되기를 자처해야 하는 게 아닐까. 누군가를 판단하고 심판하기보다.


요즈음 몇 번의 분노를 하고 나서 내린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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