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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십일월 Sep 16. 2019

우리라는 이름이었던 날들

설레는 봄과 뜨거웠던 여름이 지나고, 계절을 추억하는 가을이 왔다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본다.


‘우리’라는 대명사에 익숙해지기 시작한 것은 가족이 처음이다. 우리 가족은 가족을 위해 서로의 기둥이 되어 서로에게 의지한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우리는 지붕을 받쳐 서로를 보호하기도 한다.


우리는 점차 동네와 학교, 나라.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우리’라는 집단의 규모는 커진다. 동시에 소수의 기둥과 지붕에서 여러 개의 기둥과 커다란 지붕으로 바뀐다.


기둥은 지붕의 무게를 나눠 받칠 수 있도록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게 간격이 있고 두께가 있다. 지붕이 가볍고 작을수록 기둥은 얇고 가격을 멀리 할 수 있다. 지붕이 크고 무게가 있을수록 기둥의 역할은 중요해진다.


우리는 더 튼튼한 기둥과 지붕 아래에 있을 때 안전함을 느낀다. 우리는 안정감을 느낀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역할이 돼 주어야 한다. 안전함과 안정감을 느끼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의무를 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라는 대명사를 의지하지만 우리를 사랑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혼자라는 것을 싫어하는 존재이다. 외로움을 두려워하는 존재이다. 우리라는 대명사는 그런 이유로 생긴 것일까.


우리를 보호해줄 것만 같은 지붕이 영원할거라고 여긴다. 그러나 지붕은 때로는 사라지기도 한다. 막상 지붕이 없어도 기둥은 그대로 서 있을 수 있다. 지붕이 없으면 우리에게 하늘이 보인다. 하늘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그때는 더 이상 기둥의 역할은 필요하지 않다.


그렇게 지붕을 없애고 나면 기둥 자국이 남아 있다. 기둥이 있던 흔적은 우리였던 날들의 기억을 상기시킨다.


우리였던 날들의 기억은 슬프기도 했고 기쁘기도 했고 아프기도 했다. 기억의 흔적을 메꾸는 일에는 시간이 걸린다. 기억의 흔적을 메꾸기 전에 남아 있는 찌꺼기 같은 감정들을 파내는 일은 고되다.

그렇게 파낸 자리를 메꾸는 일도 살아가는 일이다.


우리라는 이름이었던 날들이 지나간다.

추억하기 좋은 계절인 가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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